등록 : 2009.06.17 18:38
수정 : 2009.06.1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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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0월 11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에서 유엔군 대표 제임스 머리 대령(오른쪽 가운데)과 북한 인민군의 장춘산 대좌(왼쪽)가 비무장지대의 남북 군사분계선이 그려진 지도들을 보면서 휴전선 경계를 논의하고 있다. 오른쪽 맨 뒤쪽 모습이 당시 통역관으로 참관한 필자 정경모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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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33
1951년 어느 날 볼일이 있어 휴가를 내서 서울로 나갔다가 저녁때쯤 문산캠프로 돌아와 보니 캠프 전체가 웅성웅성하면서 “커널 리 넘버원”이라고, 한국군 연락장교 이수영 대령을 칭찬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지 않겠소이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대령은 보이질 않아, 저녁 식탁에서 옆에 앉은 어느 장교에게 그 사유를 물어보니, 그날 참으로 기묘한 사건이 판문점 근처 중립지대에서 일어난 것이었소이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하는 남북 2㎞의 중립지대에는 항공기는 물론 호신용 권총 외에는 무기의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그날은 어쩌다가 미군 전투기가 중립지대로 들어가 휴전선 이북에 있는 농가에 기관총질을 하는 바람에 세살 먹은 여자아이가 죽었던 것이외다. 그래서 인민군 쪽으로부터 항의하는 긴급연락이 와 공동조사팀이 현지로 출동한 모양입디다. 이럴 때는 보통 미군 대로우 대령이 가는데 그날따라 그는 정기휴가로 일본에 가서 없고, 할 수 없이 이수영 대령이 대신 유엔군 대표로 나섰다는 것이외다.
그런데 당시 유엔군 규정으로는 공용어가 영어로 국한되어 있었던 까닭에, 이 대령이 한국사람이라 해도 대화는 영어로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소이다. 그래서 이 대령이 통역으로 대동하고 나간 사람이 해군 대위 리처드 언더우드(연세대 창립자 원두우 목사의 손자인 원일한)였는바, 한국사람 이 대령이 하는 영어를 미국사람 언더우드 대위가 한국말로 통역을 하는 그 희극적인 장면에서 보인 이 대령의 대응이 퍽 재치 있더라, 그런 얘기였소이다.
며칠 뒤 이 대령을 직접 만나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묻지 않았겠소이까. 이 대령 왈, 그날은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스러워 집에 돌아가서도 잠을 못 잤노라며, 자세한 얘기를 해줍디다.
그날 저쪽 대표로 나온 사람이 장춘산 대좌였는데 나 자신도 여러 차례 만나본 일이 있는 그는 땅딸막한 키에 당찬 생김이었고 짙은 함경도 말을 하는 군인다운 군인이었소이다.
아무튼, 이 대령이 표현한 대로 옮기자면, 우리 쪽 기록에는 그날 항공기가 중립지대로 들어간 사실이 없고, 따라서 세살 먹은 어린애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수가 없다는 말을 자신의 “신통치도 못한 영어로 씨부렁거렸다”는 것이외다. 이 영어를 언더우드가 받아서, 어려서 잠깐 서울서 자랄 때 코흘리개들과 어울려 놀면서 배운 욕지거리쯤의 한국말 실력으로 통역을 했다니, 그 광경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소이까.
그런데 조사가 다 끝나고 헤어질 무렵 북쪽 장 대좌가 한마디 건네더라는 것이오이다. “여~ 이 대령! 당신 매일 스테이크만 먹느라고 우리말은 다 잊어먹었나?” 이에 이 대령이 할 수 없이 또 영어로 변명하길, “우리는 자유민인 까닭에 우리말로 얘기하고 싶을 때는 우리말을 하고 영어를 하고 싶을 때는 영어를 한다.”
이 대령의 이 답변을 언더우드가 우리말로 옮겼겠지요. 그러자 장 대좌는 똑바로 이 대령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예이, ×새끼” 하면서 ‘칵’ 가래침을 이 대령 구둣발에 뱉고는 뚜벅뚜벅 사라지더라는 것이외다.
그 뒤 언더우드는 그때 느낀 수치감 때문이었는지 한국어를 정식으로 배워 유창하게 우리말을 구사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이 대령은 박정희 시절 프랑스 주재 대사로 발탁돼 갔는데 72년 파리의 자택에서 의문의 사망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소이다. 그때의 장 대좌 소식은 전혀 알 길이 없고 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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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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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조이 제독과 남일 장군의 대결이나, 이수영 대령과 장춘산 대좌의 대결이나 판문점 휴전회담 현장에서 보여준 피차간의 ‘결투’ 장면은 상징적으로 한국전쟁의 모순과 기만을 선명하게 보여준 것이었으며 그 전쟁이 ‘한국인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경찰행동이었다’는 미국의 주장이 과연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도 무방한 것인지, 나 자신 유엔 쪽의 일원으로 행동하고 있었으니만치 그 점이 늘 고민스러웠소이다.
더구나 유엔이 군사행동을 취할 때에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전원의 군사참모총장으로 구성되는 참모회의를 둘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헌장 제47조), 소련이 안보리를 보이콧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S/1588’을 통과시켜서는 단독으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한 것은 누가 보아도 유엔헌장의 규정을 어긴 독선적인 행위였소이다.
판문점 회의장에 세워놓은 유엔기를 가리키며 ‘저것은 불법’이라고 상대방이 악을 쓰며 지적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안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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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9일 바로잡습니다
‘길을 찾아서 32회’ 기사에서 휴전회담의 북쪽 통역관 설정식씨는 ‘경성제대 영문과’가 아니라 ‘연희전문 영문과’를 졸업한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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