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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7월 27일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의 주모자들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56년 9월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상붕이 장 부통령에게 총을 쏴 부상을 입힌 이 사건의 배후자로 밝혀진 이익흥 당시 내무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란 ‘아부 발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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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37
1956년 5월초 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아무 준비도 없이, 말하자면 무턱대고 귀국을 하고 보니, 서울에는 비상경계령이 깔려 있고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있었는데, 그 삼엄한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소이다. 그때가 마침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때문에 사람들 마음이 들떠 있을 때였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서울에 도착하기 며칠 전인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 선생이 유세 도중 이리역 열차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었소이다. 그 직전 한강 백사장에서 30만 대중을 향하여 사자후를 토했던 그가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한 군중이 경무대로 몰려드니 그 어귀에서 경찰대와 충돌이 벌어지고, 당황한 정부 당국이 비상경계령을 발포한 것인데 그 신익희 선생이란 누구이오이까? 19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김구 선생과 더불어 이국땅에서 풍찬노숙의 고역을 치르면서 구국운동에 몸 바쳐 온 분이 신 선생인데, 김구 선생이 이승만 세력에 의해 암살당한 사실로 미뤄 그의 돌연사를 자연사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고, 이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적개심은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소이다. 이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는 내가 은혜를 입은 은인이 아니오이까. 그러나 도의에 어긋나는 그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나도 국민이니만치 마음이 뒤틀리는 혐오감을 금할 수가 없었소이다. 아무튼 5월 15일 예정대로 선거는 실시되어, 대통령으로는 자유당 이승만 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뒀으나, 부통령으로는 신 선생과 같이 뛰던 장면 후보가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지 않았소이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나 할까, 이로부터 장면 부대통령의 암살극이 꾸며지기 시작한 것이었소이다. 당시 이 대통령의 나이가 여든한 살이니, 소위 말하는 유고는 언제라도 있을 수 있는 노릇이었고, 대통령 계승권을 갖는 부통령 선거는 사실상 대통령 선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부통령 자리를 장면씨가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승만 이하 자유당으로서는 얼마나 통분스러운 일이었겠소이까? 그게 9월 28일이었소이다. 그날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장면 부통령이 발을 디디는 순간, ‘꽝’ 하고 권총 소리가 울려퍼진 것이었소이다. 다행히 총알은 장 부통령의 손등을 스쳐갔을 뿐이나, 하수인이 누구였든 간에 이 대통령이 이 사건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가 있겠소이까?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김상붕이라는 자였는데, 그는 취조를 받는 자리에서 ‘자기는 <동아일보> 기자라고 하면서 기자증까지 제시하였다’고 당시의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은 대서특필하였으나, 정작 <동아일보>는 쓰다 달다 일절 대응이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 후에 밝혀진 사실로는-그 후라는 것은 사건으로부터 5년이 지난 1960년 4·19 혁명 이후인데-범인 김상붕을 사주한 자는 치안국 특수정보과장 장영복이라는 자였으며, 그 장씨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던 자는 내무부 장관 이익흥이었는바, 이자는 일제 때 평북 박천경찰서장을 한 골수 친일파였던 것이외다. 박천이라 하면 민족운동이 유별나게 치열했던 고장인데, 그때 조선인으로서 경찰서장을 지냈다면 그자가 얼마나 철저하게 총독부에 충성심을 보였나 알만하지 않겠소이까. 아무튼 범인 김상붕은 암살이 성공할 때에는 어느 운수회사 사장을 시켜주겠다는 이익흥 장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권총질을 한 것인데, 이익흥 자신은 만일 장면을 암살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면 뭔가 큼직한 보상이 이 대통령으로부터 내려질 것으로 믿었던 것 아니겠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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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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