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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연속 장기집권을 시도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왼쪽)이 당시 서울 탑골공원에 쓰러져 있다. 그 9개월 뒤인 61년 5월 16일 박정희(오른쪽) 소장은 쿠데타를 일으켜 18년 장기독재의 서곡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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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39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후유’ 하고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 아니오이까. 내가 여기서 4·19를 불러온 3·15 부정선거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겠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네 번째 연임을 위해 저질러진 선거부정은 3대 선거 때나 꼭 마찬가지였소이다. 다만 한 가지 기이한 일이 있었다면 이 대통령과 맞서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민주당 당수 조병옥씨가 암수술을 받으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그해 2월15일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병사했다는 사실이었소이다. 그러니 조씨에 대한 동정표가 부통령 후보 장면씨로 몰릴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고,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인규는 자유당 부대통령 후보 이기붕씨의 당선을 위해, 온갖 부정수단을 총동원했을 것 아니오이까. 그때 이 대통령은 85살의 고령이었으니 말이외다. 3·15 부정선거가 끝난 직후였는데 어느날 길을 걷고 있노라니까 검은 자동차가 내 옆에 서면서 창문이 열리고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소이다.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에요. 자기 차에다 나를 태우고 당시 중앙청(일제 때 총독부 건물)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가 서로 마주 앉아서 곰탕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눴소이다. 인천항에서 같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간 것이 47년 8월이었으니 13년 만에 뜻밖의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지요. 그때는 말하자면 자기가 전력을 기울인 견마지로가 주효하여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씨를 정·부통령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으니 자랑스럽기도 하였겠지요. 그때 최인규가 내게 던진 말이 잊혀지지 않소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안 계신다면 우리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겠나. 망할 것 아닌가?” 그 말을 듣고 나서 불과 며칠 뒤 4·19가 터진 것인데, 5월 29일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 부인은 하와이 망명길로 떠나게 되고, 일단 부대통령으로 당선됐던 이기붕 국회의장은 4월 28일 이 대통령의 양자로 들어갔던 장남 강석군이 쏜 권총에 부인 박마리아, 차남 강욱군과 더불어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 것이외다. 아무튼 국회에서 내각책임제로 헌법이 바뀌고, 7월 29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이제는 뭔가 이뤄지는구나 싶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한 표 찍었는데, 그것이 나로서는 처음이요 마지막 투표권 행사가 되었소이다. 이때의 총선거로 장면 내각의 성립이 발표된 것이 8월 23일이었는데, 이로부터 9개월이 채 안 되는 61년 5월 16일, 난데없이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정권을 폭력으로 깔아뭉갠 것이오이다. 박정희가 옛날 만주군 소위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라는 사실은 곧 사람들에게 알려져, 설마 그런 자가 일으킨 쿠데타 때문에 그래도 민주 절차를 밟아 성립된 장면 정권이 무너질 리가 있겠나, 나도 그렇게 믿고 주위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그 당시에는 텔레비전이란 것은 없었고, 신문은 믿을 수가 없어, 나는 날마다 라디오에 매달리다시피 미군 영어방송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겠소이까. 그때의 주한 미군사령관은 매그루더였고, 미국의 대리대사는 마셜 그린이었는데, 둘 다 각기 성명을 발표하고서 미국이 인정하는 것은 장 총리의 합헌정권뿐이며, 제멋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발포한 이른바 군사정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거의 매시간 한 번씩 방송하면서, 행방을 감춘 장면 총리는 조속히 피난처에서 나와 사태를 수습해 달라는 호소를 계속하고 있었소이다. 그때 장 총리는 겁에 질려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빠져나가 가톨릭 수녀원인가 어디에 숨어 있지 않았소이까. 나는 이 양반이 어디 있기에 나타나질 않나 공연히 조바심을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2, 3일 뒤부터는 슬슬 미국 쪽의 태도가 변해가더니, 18일쯤에 이르러서는 누가 들어도 거의 확실하게 쿠데타정권을 인정한다는 쪽으로 말투가 변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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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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