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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28 18:27 수정 : 2009.06.28 18:27

1961년 11월 12일 일본을 공식 방문한 박정희(위 왼쪽)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위 오른쪽) 총리와 2차 회담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그길로 워싱턴으로 날아간 박 의장이 11월 14일 백악관에서 존 에프 케네디(아래 가운데) 대통령과 부인 재클린(아래 오른쪽)을 만났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0

일본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뭔가 공작을 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나의 의심은 바로 적중했소이다. 미국이 쿠데타 초기 박정희를 꺼렸던 것은 그가 1948년 여순 군사반란 때 주동자 노릇을 한 좌익분자였다는 것 때문이었지만, 일본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박정희의 이용가치를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외다.

박정희가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할 때, 만주국 황제 앞에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문을 읽으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세우려는 성전을 위해 나는 벚꽃처럼 깨끗하게 질 각오다’라는 서약의 말을 남겼다는 것이나, 또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 일본인다운 행동거지가 하도 철저했기 때문에 동급생들이 그를 ‘특등 일본인’이라는 별호로 불렀다는 사실쯤은 기시를 주축으로 하는 일본 만주벌 정계인들에게 지체없이 알려졌을 것이 아니오이까.

기시로부터 총리직을 이어받은 이케다 하야토가 대미 공작을 위해 일본을 출발한 것은 박정희 쿠데타로부터 약 한달 뒤인 6월 19일이었고, 실제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한국 문제를 토의한 것은 7월 22일이었는바, 그때 이케다가 미국에 박정희를 인정해야 한다고 설득한 논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기록에는 남아 있소이다.

‘한국은 태곳적 오쿠니누시의 시대로부터 일본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나라인데 만일 부산에 적기가 나부끼게 된다면 일본은 고사하고 미국으로서도 곤란할 것이 아니겠는가. 박 정권이 민주주의적 정권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겠으나,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백년하청이고, 박은 이미 반공을 국시로 선언하고 있는 터인 만큼, 일본으로서는 박의 반공 정권을 밀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일본은 미국을 대신해 경제원조를 개시할 용의가 있다.’(<전후 일본의 외교>(戰後日本の外交), 삼성당 출판)

그때 미국은 대외 무역 적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던 판이었는데, 일본이 나서서 대신 한국에 줄 경제원조의 짐을 져주겠다니, 이거야말로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외다’라고 케네디는 무릎을 칠 정도가 아니었겠소이까.

미국의 태도가 지지 쪽으로 기운 것은 이미 이케다가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였으나, 정책적으로 지지를 결정한 것은 그가 케네디를 만난 6월 22일이었다고 나는 믿는 바이외다.

그런데 이케다가 케네디 앞에서 내세운 ‘오쿠니누시’라는 태곳적 인물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앞의 글 어디에선가 일본 신화에서는 우리 신화의 천제(天帝) 환인(桓因)에 해당하는 것이 아마테라스(天照)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지 않소이까. 그의 손주인 니니기가 이른바 천손(天孫)으로서, 하계로 강림하자 황송해하며 그때까지 자기가 지배하고 있던 나라 이즈모의 영토를 몽땅 헌상했다는 인물이 다름아닌 오쿠니누시인 것이외다. 또 신화를 보면 이 인물은 조선 땅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이고요.


이케다가 ‘신화의 인물’ 오쿠니누시를 끄집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설사 박정희에게 과거 좌익 활동을 했다는 하자는 있을망정 그자는 자기가 지배하는 나라의 영토를 몽땅 천손 민족인 우리에게 헌상할 수 있는 인물이니 걱정하지 말고 우리 손에 맡겨달라-그러한 뜻은 없었을까 독자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아무튼 이케다-케네디 회담의 결과는 즉각 박정희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며, 박은 미국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기해 ‘반공법’을 공포하였고, 미국은 잘 알았다는 듯이 7월 29일 박 정권에 대한 정식 지지성명을 발표한 것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마침내 박정희는 그해 11월 12일 도쿄를 거쳐 미국으로 가, 14일 워싱턴에서 케네디를 만나게 되는 것인데, 우선 도쿄에 도착한 그는 이케다는 물론 옛날 만주에서 육군 소위 시절 참으로 까마득한 상전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까지 만났으니 그 감격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있었겠소이까. 그 일본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훗날 메이지유신에서 따온 ‘유신 정권’을 내세울 정도였으니 말이외다.

이듬해인 1962년 2월 요시다 전 일본 총리는 역시 한국 문제를 토의하려 워싱턴에서 케네디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자신만만해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소이다.

‘우리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다시한번 조선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일한문제를 생각하다>((日韓問題を考える), 태평출판사, 1965년)

한마디 더 하자면, 요시다는 2009년 2월 현재 총리인 아소 다로의 조부이며, 기시는 바로 전 총리인 아베 신조의 조부라는 사실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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