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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29 18:27 수정 : 2009.06.29 18:27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의 ‘반공정책’ 첫 희생자는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었다. ‘북한 찬양’ 혐의로 체포된 그는 그해 12월 21일 31살 나이로 사형당했다. 앞서 10월 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에 26살의 초임 판사 이회창(맨 오른쪽) 현 자유선진당 총재의 모습이 보인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1

4·19 학생혁명을 총칼로 깔아뭉갠 박정희가 자신에게 미국이 품고 있는 의심을 풀고 일본이 걸고 있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날을 잡아 반공법을 공포했다는 것은 앞 글에서 말한 바와 같으나, 이것을 공포하고 나서 박이 가장 먼저 잡아들인 사람이 최근우(1892∼1961) 선생이었소이다.

최근우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하여 현재의 히토쓰바시대학의 전신인 도쿄(동경)상과대학에 재학중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동경 유학생 2·8선언’에 서명한 11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후에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상하이(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내는 등 박정희가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민족운동을 위해 동분서주하신 분이었소이다. ‘해방’ 이전 몽양 선생과 더불어 ‘건국동맹’을 조직하는 일에 참가하였고, 그 후 ‘건국준비위’의 총무부장직을 맡아 몽양 선생과 고락을 같이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으며 참으로 민족의 사표로서 손색이 없는 분이었소이다. 공산주의자는 물론 아니고요.

그 최 선생께서 4·19 이후, 암살로 돌아가신 몽양 선생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사회당을 조직했다는 죄로 잡혀 들어가 차고 때리고 하는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1961년 8월 3일 칠순이 가까운 연세에 옥중에서 목숨을 잃으신 것이외다. 8월이니 아마 찌는 듯한 삼복더위의 여름날이 아니었겠소이까.

이에 이어 더욱 몸서리쳐지는 일은 그해 연말이 가까워 오는 12월 21일에 일어난 것인데 그것은 내무부 장관 최인규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의 처형이었소이다.

최인규씨의 죄는 물론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이었는바, 4할 사전투표라든지, 매수에 의한 기표의 강요라든지, 또는 미리 조직된 3인조, 9인조 등을 통한 상호감시라든지, 그 죄가 법의 제재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소이까.

그런데 소위 혁명재판소라는 곳에서 최씨를 교수대에 건 이유가 ‘주권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했다’는 것이니 이건 그야말로 소가 껄껄 웃을 노릇이 아니오이까. 민주적 절차로 수립된 합헌정권을 총칼로 깔아뭉갠 자가 도대체 누군데 말이오이까.

최씨와 같은 날 처형당한 조용수 사장은, 51년 9월 밀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있다가, 4·19 이후 61년 6월 역시 밀항으로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가 일본에 있을 때나 돌아와서 분주하게 뛰고 있을 때나 내가 직접 만나 본 일은 없는 사람이었소이다. 그러나 그가 4·19 직후 앙양된 민족감정의 물결을 타고 <민족일보>와 같은 매체를 창설하여 남북간의 협상과 교류를 주장하였다면 그것은 응당 칭송을 받아 마땅할 일일지언정 어찌 그것이 교수형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일이오이까. 박정희에 대한 분노, 어처구니없다는 절망, 그리고 온몸이 오싹해지는 공포, 조용수란 사람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회의 소용돌이로 가슴이 뒤흔들렸소이다. 자기가 무엇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한다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본국으로 돌아온 것인데, 그것이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파충류의 소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오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처자 식구가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야 되겠는데, 그렇다고 밀선을 탈 수도 없고 도무지 뾰족한 수가 보이지를 않더군요. 이미 식구들과는 5년 세월 생이별중이었는데 그때는 지금 모양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일본 대사관에 가서 입국비자를 얻으면 곧바로 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소이까. 식구의 얼굴을 잠시나마 보기 위해서는 우선, 홍콩까지 가서 일본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도쿄 하네다공항에 내려 72시간 통과 비자로 내집에서 2박3일의 체류를 인정받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다시 짐을 싸들고 서울로 돌아와야 했소이다. 그 처량하고 고통스러운 이별의 경험이나마 한번 하려면 비싼 여비도 들고 일년에 한두번쯤 손님 모양으로 잠시 희끗 보였다가는 사라지곤 하니, 떠나오는 나도 나려니와 떠나보내는 아내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고 쓰렸겠소이까. 그런데도 떠나야 하는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 되면 아내는 아무 소리도 없이 주섬주섬 짐을 꾸려서 내게 넘겨주고서 하네다공항까지 바래다 주곤 하였소이다. 다음엔 언제 오느냐 묻는 말도 없었고 말이외다. 지금 막 이 얘기를 쓰고 있는 나에게 서재로 차를 날라 오는 등 시중을 들어주고 있는 늙은 아내 지요코의 모습을 보면서 벌써 몇십년이 지나간 옛날 얘기지만 그때의 가슴 아팠던 일들이 다시금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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