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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01 18:22 수정 : 2009.07.01 18:22

1962년 잡지 <사상계> 발행인으로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상을 받은 장준하 선생이 귀국 환영을 받고 있다. 오른쪽은 53년 4월 부산 피란 때 나온 <사상계> 창간호 표지.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3

서울에 돌아온 이후 내 처지는, 나뭇가지에 앉아서도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는 비둘기를 훨씬 넘어, 덫에 빠진 멧돼지처럼 암흑 속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사냥꾼에 대한 공포로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니, 어딘가 마음을 정해 한 구덩이를 판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소이다. 보따리장수(대학의 시간강사)도 하다 이 회사 저 회사 임시직원으로 전전하는 등 참으로 막막하고 절망적인 나날이었소이다.

여기까지 써내려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장준하 선생께서 암살로 돌아가실 무렵인 1975년 8월 겪으셨다는 참담한 생활이오이다. 김지하의 담시 ‘오적’(五賊)을 실었다는 죄로 잡지 <사상계>는 70년 5월호를 최후로 출판정지를 당하고, 더구나 출판사의 빚 때문에 사시던 집마저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선생께서는 변두리 면목동 셋방에서 부인이 풀칠로 봉투를 만드는 부업으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는 곤경을 겪으셨는데, 오히려 그 절망적인 곤경 때문에 선생은 사상적으로 혁명적인 변혁을 경험하신 것이오이다.

<사상계>의 창간호가 피란 수도 부산에서 나온 것이 53년 4월이었는데, 약간 의외일지 모르겠으나 잡지를 만든 자금의 출처는 부산 미공보원(USIS)이었소이다. 그러니 반독재 운동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상계>가 말하자면 미 중앙정보국(CIA)의 대변지로 발족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피란 시절인 51년 1월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 자리를 노리느라 ‘땃벌떼’니 ‘백골단’이니 하는 폭력단을 동원해 반대세력을 협박하는 한편, 비상계엄령을 내려 야당 국회의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등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키지 않았소이까. 이승만을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미국의 대외적인 처지가 곤란해지겠다는 위기감 때문에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은 52년 6월 이승만에 대한 경고로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고 있는 목적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있을 뿐’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소이다. 한편 장 선생은 광복군 시절부터 줄곧 행동을 같이해온 철기 이범석 장군이 귀국 후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조직하자 그 산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자 겁을 먹은 이 대통령이 52년 9월 ‘족청’에 대해 숙청령을 내리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몰락의 비운을 겪게 된 것이오이다. 장 선생으로서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원한도 있었고 이승만이 미울 수밖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미국은 미국대로, 장준하는 장준하대로 이승만을 밀어내야 할 필요를 느꼈던 만큼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됐고, <사상계>의 발행이 시작된 것이었소이다. 그러니 당연스럽게도, <사상계>가 겨냥한 비판의 목표는 서구적 민주주의의 규범을 벗어난 이승만의 독재였을 뿐 미국의 행패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외다. 장 선생 자신이 한국적 기독교인으로서 ‘친미반공’의 군때를 벗지 못했던 점도 있었구 말이외다.

그런 장 선생께서 운동가로서의 본질적인 의식의 변혁을 일으킨 것은 친일파 박정희에 대한 증오와, 그 박정희의 배후세력이 다름아닌 미국과 일본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까닭이었다고 생각되는 바이외다. 72년 9월호 <씨알의 소리>에 발표된 장 선생의 ‘민족주의자의 길’을 읽어보면, 새로 거듭난 장 선생의 모습을 역력하게 알아볼 수가 있을 것이외다. 이 글에서 장 선생은 ‘전 세계의 시궁창이 우리나라로 흘러들어 인류 사상 가장 전율할 만한 국제범죄가 이 나라를 무대로 자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분단을 강요하는 강대국 앞에 무릎을 꿇고서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한 사대주의 우리들’을 통렬하게 규탄하고 있소이다. 이 글에서 비로소 장 선생은 ‘세계사에서 가장 표독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악마들’에 대한 적의를 표명함으로써 한때 손잡고 있었던 미국에 규탄의 화살을 날린 것이외다. 그리고 또 우리 민족의 고통의 근원이 분단에 있음을 갈파한 뒤 ‘모든 통일은 선인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고 부르짖음으로써 반공주의로부터의 완전한 탈피를 표명하였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거듭 말하거니와, 장 선생께서는 그 혹심한 빈곤을 통해 혁명적 민족주의자로 거듭난 것인데 나 자신도 비슷한 체험을 겪었던 탓으로 선생의 내면적 변화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고 느끼는 바이외다. 내가 쓴 책 <찢겨진 산하>(한겨레출판 2009년 재판)에 나오는 세 분 선각자 중에 장 선생이 있는데, 문익환 목사가 89년 아무 주저 없이 나와 더불어 평양을 방문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장 선생에 대한 나와 문 목사의 공감이 완전히 일치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밝혀두고자 하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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