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7.02 18:54 수정 : 2009.07.02 18:54

1969년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 때 기술고문으로 일한 필자는 당시 상공부 공업국장 오원철(왼쪽)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듬해 9월 일본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청와대 경제2수석이 된 오씨가 77년 가을 충북 옥천 육영수씨의 생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막걸리를 따르고 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4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그래도 직업다운 직업을 가진 적이 한 번 있었다고 하면 울산에 석유화학단지의 건설이 시작될 무렵, 기술고문이라는 직책으로 한동안 상공부에서 근무했을 때였다고 할 수 있겠소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1969년께였겠지요. 그때만 해도 석유화학이 무엇인지 기술적으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던 때였으니만치 청와대에서 이리저리 사람을 찾다가 미국에서 유기화학을 공부하고 온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느 비서관이 내게 연락을 해왔던 것이외다. 따로 사무실도 차려주고 해서 울산에 건설이 예정된 에틸렌 10만t 규모의 공업단지를 위해 그 대략적인 구조를 거기서 내 손으로 작성했던 것이외다.

그 단지를 구성하게 될 각 공장의 제품별로 생산 규모, 공법(프로세스)의 선정, 전력수요와 건설비, 이에 따르는 차관 금액, 차관 상환을 위한 제품 가격의 산정 등등 석유화학에 관한 이런 작업은 내게는 여기(餘技) 정도의 것이었으나 꽤 열심히 일을 했소이다. 석유화학 전반에 걸쳐 한국의 시장성과 전망에 대해 내가 영문으로 써낸 보고서가 그대로 경제기획원의 공문서로 외국에 발송되는 일도 종종 있고 했으니, 내가 만일 출세를 위해 박정희의 눈에 띄도록 재주를 부리려면 그럴 만한 기회도 충분히 있지 않았겠소이까. 그러나 비둑기(비둘기) 마음은 항상 콩밭에 가 있듯이 그대로 가지에 머물러 있을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던 것이외다.

내가 망명을 결심하고 한국을 떠나려 하자 석유화학을 전담하고 있던 상공부 공업국장 오원철씨가 어느 이름난 회사의 사장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냥 머물러 있으면 괜찮은 자리에 취직도 되고 할 터인데 왜 그러느냐’고 정중하게 나를 권고해 주더이다. 딴은 에틸렌 10만t 규모로 시작된 울산화학단지는 이후 독일이나 일본에 비길 수 있는 500만t 규모로 발전했고, 거기 들어간 회사 중에는 재벌급 기업으로 성장한 예도 있었으니 그때 오원철씨의 권유를 받아들였던들 지금보다는 훨씬 편하고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외다.

그런데 왜 그런지 그 권유를 받아들일 생각은 들지 않고, ‘하루바삐 너는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고, 뒤에서 등을 떼미는 것 같은 이상스런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창비사 백낙청 선생의 말을 빌린다면, 상징적으로 말해 1970년대 이후의 한국 민주화운동 내지 인간해방운동에 최초의 기동력을 부여한 것은 세가지 사건이었다. 첫째는 김지하가 군사독재정권의 부패와 횡포를 고발하는 시 ‘오적’(五賊)을 발표한 것, 둘째는 돼지우리보다도 못한 비좁은 공방에서 무자비한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어린 여공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전태일이 자기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한 것, 셋째는 공사판 노동자들의 고된 인생살이를 한탄한 나머지 다이너마이트를 입속으로 넣고 돌진하는 주인공 동혁을 묘사한 황석영의 소설 <객지>가 나온 것이외다.

하지만 내가 최종적으로 한국을 떠날 결심으로 유효기간 6개월짜리 여권을 손에 쥐고 김포공항을 떠난 70년 9월, 그때까지 나는 전태일이고 김지하고, 또 황석영이고, 누구 하나 알지도, 만나본 일도 없었소이다.


심리학자 융이 제창한 학설 중에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이까.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말하자면 조상 때부터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무의식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어 일정한 상황에 부닥치면 그 무의식이 집단적으로 발동한다는 것이 융의 주장인데, 고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들과 나는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무의식의 충동을 집단적으로 받은 것이고, 비록 각자 취한 행동은 달랐을망정 같은 때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떠난 나그네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하오이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좀 상식을 벗어나는 짓을 곧잘 하는 나라여서 일본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자는 일본에 거주할 권리를 부여하되, 일본 여성과 결혼한 외국 남자에게는 절대로 거주권을 주는 법이 없소이다. 또 일본 정부가 그렇게 선선히 내 망명을 받아줄 리는 만무하니, 비행기 계단을 오르는 마음은 착잡하고 무거웠소이다.

고향 땅을 영영 하직한다는 감상, 일본 정부와 치러야 할 싸움에 대한 불안, 내 눈물집에 그렇게까지 많은 눈물이 있었는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