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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월 이른바 ‘핑퐁외교’ 끝에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닉슨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저우언라이 총리와 만찬장에서 젓가락질을 해보고 있다. 전격적인 ‘미-중 수교’의 충격은 박정희와 김일성의 손을 잡게 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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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6
1970년 9월 한국을 떠나올 때 6개월 기한의 여권을 내줬던 일본 정부(출입국 관리청)는 한번인가 체류기한을 연장해주더니 그후부터는 절대 안 된다고 거절했소이다. 불법체류 신세이니 언제 경찰이 잡으러 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마치 시간과 경쟁을 하는 듯이 분주하게 붓을 놀렸소이다. 그동안 도서관에도 다니고 각종 자료도 섭렵하면서 단행본 한권쯤의 분량인 32편의 글을 써서 아사히신문사로 보낸 것이 72년 2월 초순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바로 그 무렵,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북경)을 드나들면서 중국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교섭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외다.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 시대정신)라는 독일말이 있소이다. 71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미국은 월남전의 수렁 속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곤경에 처해 있었으며, 중국은 중국대로 공산세계에서의 헤게모니를 놓고 중-소 논쟁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 않았소이까. 이런 정세로 보아 무언가 놀랄 만한 역사의 전환이 있는 것이 아닐까,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나마 그 ‘시대정신’을 느끼고 있던 바로 그때 나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새로운 역사의 개막을 말하는 여러 글들을 쓰고 있던 것이었소이다. 물론 내가 그 당시 키신저가 몰래 베이징을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까닭도 없었지만 말이외다. 아무튼 원고를 마감한 뒤 며칠 지나지 않은 72년 2월 21일, 닉슨 미국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을 태운 비행기가 베이징에 도착해 마중 나온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와 악수를 하는 경천동지의 사건이 벌어졌소이다. 나도 놀랐거니와 아사히신문사 출판부 직원들도 놀라지 않았겠소이까. 이 예언적인 책을 꼭 내야 되겠는데, 저자가 체류 허가도 없이 머물러 있는 ‘범죄인’이니 신문사로서도 처지가 곤란하고, 또 만일 책이 나온 뒤 내가 본국으로 강제송환이라도 당한다면 정경모의 목숨이 박정희의 손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지 않겠소이까. 그래서 아사히 쪽에서 내게 망명 허가를 내도록 일본 정부를 상대로 강력한 교섭을 시작해 준 것이외다. 그런데 그 교섭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소이다. 일본 정부가 전폭 지지하는 박 정권에 대해서 비판을 퍼부을뿐더러, 일본에 대해서조차 아프게 찌르는 말을 서슴지 않는 한국인에게 뭐 답답하다고 망명 같은 것을 허용하겠소이까. 더구나 일본인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한국 국적이었소이다. 그리하여 아사히 쪽에서 내세운 분이 남북을 물론하고 재일동포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주는 것으로 알려진 다나카 히로시(현 류코쿠대 교수) 선생이었는데, 그분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 일본 정부는 아사히신문사가 신원을 보증한다는 조건으로 망명에 해당하는 ‘특재’(특별재류허가)를 내게 허용하게 된 것이외다. 그 후에야 신문사에서도 즉시 출간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시기가 7·4 남북공동성명과 거의 일치했으니, 아무리 우연의 일치라 해도 내게는 얼마나 극적이고 또 불가사의한 일이었겠소이까. 마침내 72년 9월 ‘남북통일의 새 아침을 맞이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내 책 <어느 한국인의 감회>가 발간되자, 이제까지 미지의 인물이었던 ‘정경모’라는 망명객이 갑작스럽게 일본 지식인층에서 유명인으로 부상하게 되었소이다. 이듬해 1월 <아사히신문>에서도 과찬이라 싶을 정도의 서평을 게재했소이다. ‘서구문명국 축에 끼었다고 명예백인쯤으로 우쭐대는 부끄러운 일본인, 간토(관동)대지진 때 6000명이 넘는 조선인에 대한 잔인한 학살 같은 것에는 눈을 감은 채, 일본이 언제 조선에 비행을 저지른 일이 있었는가고 되묻는 일본 총리(사토 에이사쿠)의 몰염치 등등 일본에 대한 비판은 자못 신랄한 것이나, 그 신랄한 비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저자의 문학·역사·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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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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