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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는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른바 ‘유신헌법’ 제정을 선언했다.(위) 그 1주일 전 일본으로 도피한 김대중씨는 망명객으로 일본 방송 등에 출연해 ‘유신 독재 체제’를 비판해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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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7
1972년이라는 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겪었던 충격적인 파동으로 보나, 또 나 자신을 찾아온 일신상의 격변으로 보나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소이다. 이미 여러차례 강조했듯이, 국제정세에 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내놓은 박정희는 그 사흘 만인 7월 7일 국무회의를 소집해 “7·4 공동성명이 나왔다고 좋아라 날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이런 자들을 단속하는 동시에 반공교육을 더욱 강화하라”는 훈시를 내렸소이다. 당시 박정희의 비위가 얼마나 뒤틀려 있었는지 알만하지 않소이까. 그해 10월 17일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이른바 ‘10월 유신’ 쿠데타는 7·4 공동성명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표시였소이다. 그 1주일 전인 10월 10일 김대중씨가 일본으로 와서 망명을 선언하지 않았소이까. 그 뒤 그로부터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됐고, 그즈음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중심인물인 배동호씨를 만났으며, 또 연이어 내 문필활동의 발판이 돼준, 잡지 <세카이>(世界)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 씨를 알게 되는 것이오이다. 이후 내가 일본에서 펼치게 되는 여러 활동과 밀접히 관계되는 이들 인사와 연속적으로 인연을 맺게 해준 연결고리는 말할 나위도 없이 그해 9월 아사히신문사에서 출판된 내 책 <어느 한국인의 감회>였소이다. 김대중씨를 처음 일본에서 만난 것은 12월로 접어든 겨울이었고, 장소는 도쿄 간다의 어느 스시집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짐작건대 누군가 그에게 위험이 닥쳐오고 있으니 빨리 몸을 피하라고 귀띔을 해줘서 허둥지둥 떠나온 것이 망명의 진상일 터이니, 일본에 와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겠다는 사전준비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지 않았겠소이까. 바로 그때 아마 우연히 내 책이 눈에 띄었고, 그래서 한번 만나보자고 연락을 해온 것이 아니었겠소이까. 김대중씨의 연락을 받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어떤 소명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게 사실이외다. 박 정권을 피해 온 망명객이 나와 김대중씨뿐이라는 것이 단순한 우연일 수는 없고, 지금이야말로 내가 뛰어야 될 때라는 것을 뜨겁게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나는 그런 뜨거운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갔던 것이외다. 물론 초면이었구요. 수인사를 나눈 다음 나는 마음속의 감회를 솔직하게 말씀드렸소이다. 71년 4월 박정희를 상대로 겨뤘던 제7대 대통령선거 투·개표 과정에서 저질러진 부정을 감안한다면, 사실상의 승자는 김대중 선생이었고, 비록 김 선생께서 망명객으로 오늘 이국땅에 와 계실망정, 나는 지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뵙고 있는 심정이라고 허리를 굽혀 인사도 드렸소이다. 그 자리에서 두 망명객은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었으며, 나로서도 이분을 위해서라면 참으로 정성을 다하여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겠노라 스스로 다짐도 하였소이다. 배동호씨를 만난 것은 김대중씨를 만난 것보다 약간 먼저였는데, 나를 배씨에게 소개해준 사람은 박덕만씨였소이다. 우연히 눈에 띄어 읽은 신문이 <통일조선신문>(일본어)이었는데, 박정희에 대한 비판이나, 일본 정부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논평이나 상당히 날카로운 글들이 실려 있어, 신주쿠 뒷골목에 있는 그 신문사를 찾아가서 만난 분이 박씨였는데, 일본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정을 털어놓고 내가 동지로서 사귈 만한 개인이나 또는 단체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소이다. 배씨는 원래는 민단 소속이었는데, 7·4 공동성명 이후 민단을 떠나 ‘민족통일협의회’라는 새 조직을 만들어 이끌고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박씨로부터 들었을 뿐, 배씨가 거기에 이르기까지 민단 안에 어떤 복잡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새로 만든 조직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으나, 옛날 만주국에서 판사 노릇을 했다는 권일 따위의 인물이 지배하고 있던 민단 조직에서 뛰쳐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반가운 만남이었소이다. 이듬해 김대중씨가 납치된 뒤부터 내가 흔쾌히 ‘한민통’의 기관지 <민족시보>의 주필이라는 직함으로 논진을 펴게 된 것도 그와의 인연 덕분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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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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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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