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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09 18:32 수정 : 2011.07.07 09:28

1985년 2월 6일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오른쪽)와 와다 하루키(왼쪽) 교수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을 강행하는 길에 잠시 일본 나리타공항의 호텔에 묵고 있던 김대중씨를 방문했다. 야스에 편집장은 필자의 일본 집필 활동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요시다 루이코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49

월간지 <세카이>(世界)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를 처음 만난 것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인 1973년 2월쯤이었는데, 그가 <아사히>에서 나온 나의 첫 책을 읽은 뒤 내게 박덕만씨를 보내 ‘한번 만나뵙기를 원한다’고 정중한 전갈을 해온 것이외다.

융숭하게 차려진 저녁상을 두고 마주앉아 두 사람은 많은 말을 나누었는데, 대화의 중심 화두는 우연하게 갑오농민전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이 전쟁은 본래 인내천(人乃天)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운동이 그 시발점이 아니었소이까. 이 운동이 정치성을 띠고 일대 혁명운동으로 팔도강산 방방곡곡으로 퍼지게 되자, 조정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도 군대를 파견해 혁명운동을 궤멸시키는 동시에 조선을 아시아 전역에 대한 침략의 발판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 이는 일본 자체에도 불행한 전쟁이었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소이다.

‘수운 선생의 인내천 사상은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병폐를 혁명적으로 뒤엎는 뛰어난 사상이었으며,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 점에서 인간 평등을 누구보다도 더욱 구체적으로 갈파한 것이다. 또 비단 우리나라 조선뿐만 아니라 전 인류사회에 대해서조차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선진적인 사상이었다.’ 약간 취기도 돌고 해서 나는 퍽 흥분한 어조로 첫 대면인 야스에에게, 말하자면 웅변을 토한 셈이었소이다. 그가 수첩을 꺼내 내가 하는 말을 열심히 기록하던 모습도 벌써 30여년이 지나간 옛일이지만 지금 기억에서 떠오르고 있소이다.

수운 선생과 <기독교의 본질>을 쓴 포이어바흐는 거의 같은 시대를 산 인물인데,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저서에서 ‘호모 호미니 데우스’(homo homini deus)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소이다. ‘사람은 사람 자신에 대해 신이다’라는 뜻의 이 라틴어는 그가 무신론을 주장하는 가운데서 나온 말이고, 수운 선생이 말한 인내천과는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니지만, 인간이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발상은 공통된 것이어서, 종교사상적인 견지로도 퍽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까 싶은데, 그 전쟁 때, 즉 청일전쟁 때 일본 사람들은 이를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외다.

하기야 동학농민군은 짚신을 신었고 기껏해야 무기는 화승총 정도가 아니었소이까. 이에 비해 일본군은 쇠가죽 군화를 신었으며 들고 온 무기는 최신식 무라타 연발총이었으니, 5만 농민군은 폭풍에 휩쓸린 싸릿가지처럼 스러졌겠고, 폭풍같이 몰려온 그들의 긍지는 얼마나 기고만장했겠소이까.

그런데 말이외다, 그 당시 일본인의 종교는 ‘근대화’였고 동학농민군의 믿음은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인내천이었으니 실상 따져 보면 어느 쪽이 문명이고 어느 쪽이 야만이었는지는 역사가 증명해준 것이나, 통탄스러운 것은 청일전쟁 때 가장 앞장서서 ‘문명 대 야만론’을 주장한 사람이 우리나라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치무라 간조 선생이었다는 사실이오이다.

내가 이 얘기를 하면서 표정이 상당히 격해 있었던 모양이겠지요. 야스에는 일본이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세례를 받은 비극의 출발점이 바로 그 갑오농민봉기에 대한 간섭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이었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혹시 그 전쟁 당시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남긴 회고록 <건건록>을 아는가고 묻더이다. 무쓰라는 이름쯤은 기억하고 있으나 그의 회고록은 읽어본 일이 없노라고 하니까, 자기가 그 내용을 대강 내게 설명해주더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일본이 중국을 잠식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선이라는 발판이 필요한데, 청국은 조공관계를 통해서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첫째, 때마침 일어난 ‘동학란’을 구실로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에 병력을 파견토록 하고, 둘째, 이것을 빌미로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여 청국과의 전쟁을 도발하며, 셋째, 전쟁에 이긴 다음 조선을 조공관계로부터 이탈시켜 명목상 독립국가를 자처하게 한 다음, 넷째, 서서히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 전략을 치밀하게 세우고 실천한 인물이 무쓰 무네미쓰인바 일본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건건록>은 필독서라는 것이외다.


그날 저녁 야스에와의 만남은 뜻깊은 자리였고 일본에서 꼭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났다는 감회를 느꼈소이다. 밤이 늦어 헤어질 무렵 그는 다시 정중하게 말을 건네더이다. “선생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좋으니 잡지 <세카이>를 이용해달라”고 말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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