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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통의 기관지 <민족시보> 1976년 5월 1일치에 필자(왼쪽)와 일본 사회당 소속 참의원 덴 히데오(오른쪽)의 대담이 실려 있다. 필자는 73년 배동호씨와의 인연으로 <민족시보> 편집에 참여해 78년 한민통에서 ‘추방’될 때까지 주필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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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64
하나의 조직체가 기능을 발휘하려면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 능력이 갖춰져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그런데 한민통 조직 안에는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한 사람도 없었소이다. 그 세 가지 기능을 동시에 혼자서 발휘하고 있는 것이, 밖에서 굴러 들어온 돌에 불과한 나 정경모였으니, 그 사람들 속이 뒤틀렸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앞 글(58회)에서 아오치 선생이 나를 칭찬하는 글을 <현대인물사전>에 써주셨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지 않소이까. 나는 그 사람들의 생리를 아는 까닭에 아사히신문사에서 그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조차 근 1년 동안이나 그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는데, 불찰이었다고나 할까, 어느날 사무실 젊은 사람들에게 그 책을 보여준 일이 있었사외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곽동의는 샘이 났겠지요. 쪼르르 아오치 선생을 찾아가서 했다는 그 천박한 중상의 말. 내가 한민통의 일원으로서 얼마나 일본 사람들에게 창피했겠소이까. 그중에서도 제일 내게 악의를 품었던 이가 ‘김대중 수석비서관’ 조활준이었소이다. 당시 내가 젊은 사람들 읽으라고 기관지 <민족시보>에 ‘케이(K)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글에서 나는 절대왕조의 군주로서 영국의 청교도혁명 때 처형당한 찰스 1세의 얘기라든지, 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등장하는 프랑스혁명 때의 이야기라든지, 여러가지 역사의 일화를 소개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그것이 수석비서관 ‘나리’에게는 속이 상해서 못 견딜 노릇이었던 모양이외다. “한국의 민주화면 한국의 민주화지, 툭하면 프랑스혁명, 프랑스혁명 하는데 그게 도대체 뭐냐?” 그건 이자가 감히 내 앞에 와서 항의하는 말도 아니고, 그저 먼 발치에서 꽥꽥 소리를 치면서 하는 욕설이었는데, 이게 어디 민주화니 통일이니를 간판으로 내세운 조직 안에서 있을 수 있는 노릇이오이까. “한국놈이면 한국말로 할 것이지 돼먹지 않게 영어를 씨부렁거린다”고 내게 대들던 곽동의는 또 이 조직의 조직국장인데, 이거 외부 사람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노릇이오이까. 이쯤에서 내가 무슨 이유로 외신기자들이나 일본에 있는 외국 공관들이 애독해주던 <코리아 뉴스레터>(KN)의 발행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나, 그 포복절도할 희극, 아니 울어도 시원찮을 비극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 되겠소이다. 어느날 한민통 사무실로 서울에 있는 독일대사관 일등서기관을 비롯해 직원 네 사람이 나를 찾아왔소이다. <코리아 뉴스레터>를 읽으면서 탄복을 금치 못해 ‘에디터(편집인) 정경모’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것이외다. 서울에 있는 독일대사관까지는 내가 보낼 리가 없는데, 아마 도쿄대사관으로부터 파우치(외교행낭) 편으로 받아서 읽었겠지요. 그 내용이 서울서 자기들이 목격하고 있는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네들이 모르는 얘기까지 포함돼 있어, 그것을 읽고 서로 토론을 할 때는 목소리가 외부로 새나갈까봐, 쏴 하고 물소리가 나도록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추어 얘기를 했다는 것이외다. <코리아 뉴스레터>가 제공하는 정보는 자기네들에게 퍽 도움이 되었고,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에도 그것을 반영했노라고 나를 칭찬하고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독일 사람들은 돌아갔소이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안 된 때였는데 “정경모는 스파이다”라는 뜬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하더이다. “아, 서양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정경모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꽉 잠그고 쑤군쑤군 무슨 얘기를 하는데 그 말이 전부 영어더라. 그러니 정경모는 스파이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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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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