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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858편’ 폭파 용의자로 붙잡힌 김현희(마유미)가 대선 바로 전날인 1987년 12월 15일 서울로 압송돼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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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94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꿈틀거리는 반미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미국이 1987년 6·29 선언을 발표하게 하고, 김대중씨에게까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는 자유를 인정했으되, 절대로 당선은 저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었다는 것은 앞 글에서도 말한 바가 있지 않소이까. 그런데 선거운동을 시작한 김대중씨는 내가 바다 건너 일본에서 넘겨다보아도 이상스러울 만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어요. 왜 그럴까 머리가 갸우뚱해질 만큼 그 양반의 자신감은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를 나는 짐작할 수가 없었소이다. 이건 본국의 ‘카더라’ 방송을 몇 다리 거쳐서 들은 얘기에 불과하니까 혹시 실례가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김 선생 은행계좌에 2만원 또는 3만원가량의 소액 기부금이 날마다 수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국민들의 지지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구만요. 또 김 선생이 항상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 군부에서조차 별을 단 장성들이 줄을 지어서 찾아와서는 자기들은 김 선생에 대해서 적의를 품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김 선생의 승리를 바람직스럽게 여기고 있노라고 격려의 말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혹시 자신과 김영삼씨의 후보 단일화를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일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김 선생은 혹시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주한 미 대사 릴리가 몇 차례인가 찾아가서 출마를 종용했다는 얘기도 듣고 있었는데, 김 선생께서는 릴리의 그 말을 듣고 그렇다면 후보 단일화는 필요없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저버릴 수가 없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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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인 12월 13일 ‘6·29 선언’으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가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100만을 헤아리는 청중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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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면 유신체제의 잔당인 노태우에게 정권을 빼앗기는 일도 없었겠거니와 다음다음 차례의 선거 때 김종필이 거느리는 표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굴욕도 모면할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을 저버릴 수가 없었소이다. 아무튼 문제는 후보 단일화가 깨지고 정권이 노태우 손으로 넘어갔을 때의 그 참담했던 상황이외다. 6월항쟁 때의 그 뜨거웠던 열기는 그야말로 운산무소, 방향감각을 잃은 민중들은 어찌해야 될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할 뿐이 아니었소이까. 이건 평양 가는 길에서 문 목사로부터 직접 들은 얘긴데, 자기도 김 선생께 간곡하게 후보 단일화를 권고했다는 것이외다. 김 선생께서는 12월 열흘까지만 자기를 밀어다오, 그러면 그 힘을 빌려 김영삼씨와 후보 단일화를 성사시키겠다, 그렇게 약속을 했다는 거죠.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던 것이외다. 역사라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것이외다. 후보 단일화에 대한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6월항쟁의 열기가 운산무소되었다는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갈 테야 문 목사’께서도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89년 평양행을 결심하신 것이고, 그때의 4·2 공동성명이 그 후의 6·15 공동선언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오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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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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