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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9.17 18:35 수정 : 2009.09.17 18:35

1985년 10월 16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특사로 평양을 극비방문한 박철언(오른쪽)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 이튿날 오전 주석궁에서 허담(가운데) 비서가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왼쪽) 주석과 만나 건배를 하고 있다. 박씨는 필자보다 보름 앞선 89년 11월에도 평양을 방문해 노태우-김일성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중에서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99

무슨 용건으로 갑자기 도쿄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으나, 리영희 선생께서 오셨다니 만사 제쳐놓고 가서 뵈어야지요. 그때 운동권 학생들은, 그게 바로 이른바 ‘386 세대’였겠으나, ‘리영희 선생은 서울에 와 있는 정경모요, 정경모는 일본에 가 계신 리영희 선생’이라고들 말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만큼 학생들은 리 선생과 나를 겹쳐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오이까.

짐을 싸다 말고 <한겨레> 도쿄지국으로 달려가 리 선생을 만났지요. 마침 간다 뒷골목 음식집 거리에 불이 밝혀질 무렵이어서 유명한 스시집에 자리를 잡고 리 선생, 주익군, 나 셋이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빼앗기지 않아도 되었을 정권을 억울하게 노태우에게 빼앗겼던 선거 때의 이야기랑, 뭐 대단스런 일이라도 치르고 있다는 듯이 득의만면하여 올림픽에서 날뛰고 있던 이어령 따위의 유치한 꼬락서니랑, 쌓였던 얘기로 꽃이 피었을 것 아니오이까.

시간이 느지막하게 되어 자리를 뜨게 되었을 때 리 선생이 묻지 않겠소이까.

“또 만나야 되지 않습니까?”

말문이 꽉 막혀 버렸소이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평양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리 선생이라 해도 말할 수는 없었소이다.

“아, 그럼요. 또 만나야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는 “리 선생이 전화를 걸어 오실 텐데 그때는 무슨 급한 볼일이 생겨 규슈지방으로 출장 나갔다고 적당히 얼버무리라”고 귀띔을 해놓고는 다음날 아침 나리타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떠난 것이었소이다. 리 선생에게 거짓말한 것을 참말로 미안스럽게 여기면서 말이외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나, 그때 무슨 용무로 리 선생이 도쿄까지 오셨는지 시침 뚝 떼고 내게 말씀을 안 하셨다는 뜻에서 거짓말을 한 것은 서로가 피장파장이었던 것이외다. 그때 리 선생께서도 <한겨레신문> 창간 1돌 기념행사로 기자단을 조직해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다는 복안이 있어, 누군가 다리를 놔줄 사람을 찾으러 오셨던 것이었소이다. 그 당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다리를 놓아줄 인물이 있다면 사회당 도이 다카코나, 아니면 잡지 <세카이>의 야스에 료스케였겠지요.

후에 리 선생께서는 기자단을 데리고 평양을 방문하려던 계획이 탄로가 나 6개월 동안이나 징역살이를 하시게 되는 것이나,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몇 해가 지난 뒤에 도쿄의 같은 스시집, 같은 자리에서 다시 술잔을 들게 되었을 때 얼마나 배꼽이 빠질 정도로 서로 웃어댔겠소이까.

아무튼 나는 12월 16일 나리타를 떠나 그날 중으로 베이징에 도착, 하루 저녁을 경륜호텔에서 묵고, 다음날 오후 평양에서 파견되어 나온 안내원 ‘박 국장’의 안내로 평양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소이다. 그러니까 내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12월 17일 저녁쯤이었으며, 난생처음 밟은 평양 땅이었는데, 참 이상스러운 것은요, 이 얘기는 대통령 노태우의 처조카가 된다는 박철언씨의 ‘회고록’(<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랜덤하우스중앙·2005년)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박은 ‘노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적십자 깃발을 단 그랜저승용차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88년 11월 3일부터 12월 2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노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를 전했다’는 것이 아니오이까. 내가 평양에 도착하기 불과 보름 전에 박이 정상회담을 거절당하고 평양을 떠났고, 나는 성격이 다른 또하나의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한 것이니, 돌이켜보면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시나리오에 따라서 역사 드라마의 배우 노릇을 한 것이 아니오이까.

이듬해 봄 문 목사께서 김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마치고 도쿄를 거쳐 서울로 돌아가시자, 뭐 금방 하늘이 무너지기나 하는 듯이 노태우 정권은 야단법석을 부리지 않았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때 나는 아무리 향기로운 장미꽃 내음이라도 똥파리들에게는 악취일 뿐이니 그들을 탓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 분노를 달래려고 하였으며, 지금도 그때의 느낌에는 변함이 없소이다마는,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남북 정상회담은 자기들이 하고 싶었던 것인데 자기들은 못하고, 문 목사가 해치웠으니 질투가 나지 않았겠소이까. 자기가 했더라면 세기의 로맨스였을 터인데, 문 목사가 했으니 그건 범죄적인 스캔들이었던 것이외다.

그 모든 야단법석은 질투 때문이었다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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