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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 31일 북한이 함북 무수단리의 기지에서 대포동미사일을 발사하자 미국은 전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왼쪽)를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해 대화를 시도했다. 그해 12월 페리는 청와대를 방문해 김대중(오른쪽) 대통령과 대북정책을 조율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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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28
앞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타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약속대로 8월 8일 3차 회담을 제네바에서 재개하여, 10월 1일 ‘북-미 기본합의서’에 조인하기에까지 이르렀소이다. 그러나 경제제재를 해제하고 북-미간의 국교 정상화를 향하여 노력한다는 ‘합의서’는 빈껍데기 부도어음이었을 뿐, 거기에 담긴 약속을 이행할 의사는 처음부터 없었으며, 그저 오늘일까 내일일까 북한의 내부붕괴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소이다. 합의서를 조인해 놓고서도, 북한을 겨냥하여 핵폭탄을 투하하는 군사훈련은 텍사스의 군사기지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96년 4월 일본을 방문한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후방기지인 일본이 군사행동 중의 미군에게 제공해야 할 각종 원조에 관한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작성하도록 요구하였소이다. 김 주석 서거 후 합의서야 어떻든지 간에 북한과의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행태에 화가 났던지, 94년 내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하고 있을 무렵 병문안을 겸해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소이다. “김 주석 서거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는 편견과 인종차별로 일관된 것인데, 한반도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무리들이 6·25전쟁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몇백만이라는 코리안들을 지상에서 말살할 수 있는 거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전율을 느낍니다. 미국인들이 자기 나라 역사를 직시하며 한반도의 분단과 몇십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극한적인 대립 상태에 책임을 느낄 날이 오겠는지는 암담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유엔에 남북이 동시에 가입했을 때의 전제조건이었던 이른바 크로스(교차) 승인 문제에 대해서 미국이 저지른 배신행위에 대해서도 커밍스는 대단히 분개하고 있었소이다.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 것은 91년 9월이었는데, 그때의 동시가입은 75년 유엔 총회에서 당시 미 국무장관 키신저가 내놓았던 제안에 따른 것이었고, 이 제안은 중국과 소련이 남한을 승인하고 동시에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한다는 교차승인이 전제조건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원래 교차승인안에 반대한 것은 오히려 북한이었소이다.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서 김 주석을 만났을 때도 교차승인은 남북의 분단을 국제적으로 합법화하는 것이므로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상당히 강경하게 주장했던 것이외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고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중국이 급속도로 남한으로 접근해 가는 상황에서 북한은 마지못해 키신저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시가입을 결정한 것인데, 중국과 소련은 남한을 승인했으나 미국과 일본은 약속을 어긴 채 오늘에 이르지 않았소이까. 미국은 어음을 끊어 놓고서도 번번이 부도를 냈을 뿐, 한번도 의무를 이행한 적이 없소이다.아무튼 ‘기본합의서’를 조인해 놓고서도 그저 수수방관으로 세월을 보내던 미국은 98년 8월 갑자기 ‘평북 금창리에 있는 지하시설은 핵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고 북한의 ‘배신행위’를 규탄하는 맹렬한 언론 캠페인을 시작하였소이다.(<뉴욕 타임스> 98년 8월 17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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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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