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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9월 재독동포들의 강연회 초청을 받아 베를린을 방문한 필자(왼쪽 다섯째)와 ‘씨알의 힘’ 회원들이 윤이상 선생의 자택 앞에서 함께했다. 마침 75살 생일을 맞아 축하 꽃다발을 들고 선 윤 선생(오른쪽 다섯째)과 생전 마지막 만남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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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33
반독재 투쟁이 국제적인 규모로 퍼져나갔을 무렵 그 운동이 상징적으로는 국내의 문익환 목사, 일본의 정경모, 독일의 윤이상 선생 삼각체제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앞글에서도 말한 바와 같거니와(65회), 윤 선생께서 고향인 통영 땅을 밟지 못하신 채 객지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의 일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하외다. 윤 선생과 문 목사, 그리고 나 정경모는 말하자면 삼형제 격이었는데, 윤 선생께서는 나를 끔찍이나 아껴주셨소이다. 1992년 어느날 윤 선생으로부터 팩스가 왔소이다. 9월 12일 베를린에서 동포와 유학생을 모아 강연회를 열 계획인데 오지 않겠는가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9월 17일이 윤 선생이 75살 되는 생일날이었소이다. 그래서 사업상의 동반자인 김홍무 동지와 윤 선생을 만나러 독일 여행 계획을 세우고 숙생들에게 발표하니까 너도나도 희망자가 속출해 결국 8명으로 ‘씨알의 힘 방독단’이 구성되어 떠나게 됐소이다. 12일의 민족문제 강연회에는 함부르크에서 뮌헨에 이르는 독일 각지에서 유학생 300여명이 모여들어 식장을 꽉 메운 상태였고, 연단에 서서 발언한 연사는 윤 선생, 송두율 교수, 나 셋이었는데 그때가 바로 유고슬라비아 민족문제에 불이 붙어 세르비아인과 헤르체고비나인들이 피로 피를 씻는 비극을 벌이고 있을 때였소이다. 연단에 선 나는 어떻게 하면 이런 비극을 거치지 않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절박한 심정으로 청중에게 호소했다고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 이튿날에는 ‘씨알의 힘’ 일행이 비용을 거출하여 중국요릿집에서 윤이상 부부를 위한 생일잔치를 열었소이다. 이 자리에는 이영빈 목사 부부와 뮌헨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던 안석교 교수도 참석해 우리 일행에게도 퍽이나 흐뭇한 저녁이었소이다. 그러니 이 소문은 즉각 일본에 있는 곽동의 의장에게 보고되었겠지요. 여기서 94년 9월로 얘기가 뛰게 되는데, 그때 서울에서는 ‘윤이상 음악제’ 준비가 착착 진행중이었고, 김영삼 정권의 간섭이 있기는 하였으되 그때가 고향땅을 밟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해서 자유의 몸으로는 실로 28년 만에 귀국을 결심하였던 것이 아닐까 해요. 그때 또 ‘윤이상은 변절한 제2의 이광수’라느니 ‘금후 평양과는 손을 끊겠다는 조건으로 5만달러를 어느 재벌한테서 받았다’느니 하는 뜬소문도 돌고 있었으나 괘념치 않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던 어느날 베를린에 사는 한국인 부부 두 쌍이 험한 표정으로 찾아왔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만일 선생이 한국으로 간다면 분신자살을 각오하고 있는 젊은 사람 몇이 지금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선생의 명예를 짓밟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으니 가려면 가보시오.” 윤 선생께서는 그 자리에서 심장발작으로 넘어져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결국 이듬해 95년 11월 3일 78살을 일기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소이다. 부인 이수자 아주머님이 쓰신 평전 <내 남편 윤이상>(창비·1998)에는 협박을 하러 왔던 두 쌍의 한국인 부부가 ‘통일운동을 하는 조직’의 성원이라는 지적은 있으나, 그들이 자발적으로 한 짓이었는지, 어느 누구의 사주를 받고 한 짓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소이다.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나간 어느날, 한 친구가 불고기집을 새로 차렸다고 해서 같이 초청을 받은 또 한 분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소이다. 그분이 취기가 돌더니 곽 의장 칭찬을 하더군요. 베를린에다 전화를 걸어 윤 선생이 한국으로 가지 못하도록 일일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옆자리에서 보았는데, 그 활약 때문에 윤 선생을 막았다고 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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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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