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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대동단 창립의 두 주역인 두암 전협 단장(왼쪽)과 역전 최익환이 1919년 9월 체포돼 공판장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전협 단장은 왜경의 고문으로 출옥 직후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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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2
조선민족대동단(이하 대동단)은 1919년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지하조직으로서 우리 항일독립투쟁 역사상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에게 대동단은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대동단 총재였다는 사실보다 일부 서예가들 사이에서는 항일투쟁을 한 한말의 명필로 기억되는 듯하다. 또 의친왕 이강의 중국 망명 미수사건 관련자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대동단은 19년 3월1일에 일어난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국으로 퍼져가던 시기인 4월 초에 결성됐으며, 결성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본부 조직이 노출되어 지도급 인사 대부분이 투옥되는 불운을 겪었다. 대동단 단원이었던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대동단의 투쟁에 관해서는 당시 일제 경찰의 <사건조서>와 신복룡 교수가 지은 <대동단실기> 등에 잘 나와 있다. 3·1독립선언을 계기로 여기에 호응한 거족적인 시위가 전국에서 전개됐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애국심을 자극하여 그즈음 여러 개의 비밀결사가 생겨났다. 대동단 결성에 최초로 관여한 사람은 단장을 맡게 된 ‘두암’ 전협 외에 최익환, 권태석, 권헌복, 정남용 등이다. 이들은 모두 당시의 지식인들로서 출신 배경은 다르지만 나라를 되찾겠다는 열정은 같아 아주 짧은 시일 안에 항일 지하조직을 구축하자는 데 합의를 본 것이다. 일제 경찰과 검찰 조사 기록을 보면, 대동단이란 조직의 명칭은 ‘역전’ 최익환이 제안한 것이다. 그는 법정에서 “…정의·인도는 세계에 동일한 것이고 조선인도 이 크나큰 정의·인도 아래 단결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대동단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대동’(大同)이란 말은 <예기>에 나온다. <예기> 예운편에 “큰 도(道)가 행하여지던 때에는 널리 이로움을 위하여 어질고 능력 있는 자를 뽑아 신의를 강의하고 화목함을 수행하여,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노인으로 하여금 그 여생을 마칠 곳을 갖게 하며, 장년으로 하여금 일할 곳을 갖게 하며, 어린이로 하여금 자랄 곳을 갖게 하여, 과부와 외로운 사람과 병들어 몸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들 모두가 부양을 받을 수 있고, 남자는 직분을 가지며,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었다. 돈을 땅에 버리기를 싫어했지만 나를 위해 감추지 않았고, 힘을 쓰고자 했으나 나를 위해 쓰지는 않았다. 이런 까닭에 한가로움을 꾀함이 없고 도적질과 난적(亂賊)이 일어나지 않아 밖으로 사립문을 닫아걸지 않으니 이를 가리켜 대동이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대동’의 뜻을 옮기고 보면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로버트 오언이 이야기한 ‘공상적 사회주의’ 주장에 가까운 것 같다. 곧 사회주의적 이상향이 유럽보다도 2000여년 전 중국에서 이미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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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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