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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05 18:38 수정 : 2010.01.06 16:59

대동단 창립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태석(앞줄 왼쪽)은 1945년 8·15 직전 발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무경부장을 맡기도 했다. 사진은 해방 이후 한국독립당사 근처에서 한독당 중앙상임위원 조경한(앞줄 가운데), 안재홍(앞줄 오른쪽)과 함께한 모습이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3

대동단은 1919년 11월28일 자체 독립선언을 발표하면서 거국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다가 실패했다. 이로써 본부 조직이 발각되어 대동단의 많은 문서가 일제 경찰에 압수되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덕분에 이 문서들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당시 대동단 활동의 전모를 엿볼 수 있다.

 대동단은 이미 4월에 조선민족대동단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진정서’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 등을 발송했다. 그리고 5월에는 ‘선언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할 것’, ‘세계 영원의 평화를 확보할 것’, ‘사회의 자유발전을 광파할 것’ 등 3대 강령을 제시했다. 또 5월에는 ‘일본 국민에게 고한다’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그외에 ‘독립대동단 임시규칙’과 ‘대동단 임시규칙 세칙’(4252년-1919년 9월17일치 문서)도 남아 있는데, 특히 ‘임시규칙’ 제2장 제5조에는 ‘본단은 사회주의를 철저적으로 실행한다’고 적혀 있어 주목할 만하다. 대동단은 우리나라의 정당·사회단체 중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한 첫 단체인 것이다.

 이 문구 때문에 대동단을 ‘사회주의 단체’라고 규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복벽주의 이념’을 가진 조직이라는 상반된 주장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소견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대동단 사건’에 관한 재판 기록을 보면, 초대 단장인 두암 전협은 분명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던 듯하다. 17년 11월의 러시아혁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으며, 그때 표방한 국제주의와 레닌이 내세운 약소민족의 해방은 분명히 피압박 민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암과 더불어 맨 처음 대동단 조직을 논의했던 최익환과 권태석 두 사람도 출옥 이후 행적으로 보아 사회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따라서 이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논의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그러나 대동단은 ‘독립’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각계각층이 뭉친 것이지, 조직을 결성할 때부터 조국 독립 이후의 정치체제를 언급한 ‘임시규칙’을 토론하고 통과시켰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임시규칙’을 문서화한 시기는 그해 9월로서, 그때는 최·권 두 사람이 이미 체포된 뒤였다.

 내가 알기로는, 할아버지(김가진)가 대동단 총재로 취임한 뒤로는 중요한 결정이 모두 종로 체부동의 우리집에서 이루어졌으며, 선언문·강령·규칙 등도 모두 거기에서 할아버지와 두암, 정남용 세 분이 결정했다고 한다. 그때 20살인 아버지(김의한)도 이 모임에는 늘 참석하여 대강의 논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지하 비밀결사의 성격상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다시 어렵게 회의를 열어 번복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동단을 복벽주의자 집단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할아버지가 대한제국의 고관이었다는 사실과, 의친왕 이강과 함께 망명할 것을 구상한 것을 그 근거로 삼는 듯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동단의 ‘임시규칙’ 등 중요 결정이 할아버지 참석 아래 이루어진 것이고, 그때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한다’고 규정하는 데도 할아버지의 동의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개화파 관료였던 할아버지가 이 새로운 사상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음은 당연할 것이다.

 또 의친왕을 망명시키려 한 것은 그것이 국제적으로 일으킬 파장과, 상하이 후이펑(회풍)은행에 있던 고종의 예금을 항일투쟁에 사용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최소한 의친왕이야 왕정복귀를 바랐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대동단의 의친왕 망명 기도=의친왕 즉위=왕정복귀=복벽주의 집단 대동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대동단원 중에 이달하라는 복벽주의자가 있었다는 일제 경찰의 조사 기록도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예외적인 존재다. 이달하는 국내에서 대동단 조직이 붕괴될 즈음에 입단한 사람으로 주도적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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