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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11 18:38 수정 : 2010.01.11 18:38

필자의 부친 성엄 김의한(왼쪽)과 모친 수당 정정화(오른쪽) 부부의 1919년 상하이 망명 무렵 모습. 동갑인 두 사람은 10살 때 혼인해 소꿉친구로 함께 자랐고 46년 귀국 때까지 항일투쟁을 함께 한 동지였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

아버지(김의한)가 할아버지(동농)를 모시고 망명한 지 약 두 달 뒤 어머니(수당 정정화)가 같은 길을 밟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너그러운 성품이었으며, 동시에 항상 낙천적이며 겁이 없는 편이었다. 만사에 신중하지만 결심을 하면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어머니는 결혼 초부터 가세가 점점 기울어 시집살이도 편치 않았으나 어려움을 잘 견디면서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집안을 잘 꾸려나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부자가 떠난 상태에서 처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상하이로 가서 칠순 넘은 시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며느리의 도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1919년 12월 초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상하이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오르게 되었다. 유교사상에 젖어 있던 그때 어머니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항일전선에 참여한다는 뜻을 갖고 망명길에 올랐다기보다는 오직 며느리의 도리와 책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친척 오빠 중에 중국어를 어느 정도 하며 만주 일대를 내왕하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안내 책임을 맡겼다. 서울에서 상하이까지 가는 데는 기차를 몇 번 갈아타야 했는데, 대략 1주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때까지 서울에서도 친정 나들이 정도가 고작이었던 어머니는 그렇게 세계 최대 도시의 하나였던 상하이에 도착했다.

안내인은 상하이 자베이(갑북)역에서 인력거를 타는 것까지만 보고 헤어졌다. 인력거를 타고 프랑스 조계 안의 한인 거주지를 찾아 처음 도착한 곳이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그 집에 도착한 시간이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함께 식사를 한 뒤 손 목사가 직접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까지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예고 없이 어머니가 나타났으니 두 분의 놀라움은 대단했으리라.

어머니 말씀으로는, 할아버지는 출발할 때 적지 않은 돈을 갖고 떠났으나 두 달 사이에 거의 다 써버린 상태였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갖고 온 돈으로 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에서 갖고 떠난 여비 중 상당 부분은 이미 가는 길에 써버렸으며, 새로 살림살이를 장만하다 보니 남은 것이 별로 없어 친정에 가서 돈을 좀 얻어 오기로 결심을 했다.

당시 임정에서는 국내와의 비밀내왕 방법으로 연통제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연결선을 이용할 생각으로 법무총장 신규식과 우선 상의를 했다. 그해 4월 상하이에서 임정을 조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던 한 분인 예관 신규식 선생은 우리 가족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대동단의 재정부장을 맡았으며 단장인 두암 선생을 할아버지에게 소개한 내 외삼촌 입재 정두화와는 한말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외삼촌은 예관이 11년 망명할 때에도 자금을 댄 일이 있고, 대동단이 창립되자 그를 해외지부 총책임자로 위촉한 일도 있는 사이였다. 어머니는 상하이에서 예관을 처음 만났으나 곧 오라버님으로 대하게 됐다고 한다.


어머니의 결심을 듣자 예관은 우리 가족들과 상의를 하여 친정의 도움을 청하는 데 그치지 말고 임정의 활동자금 모금의 밀명을 맡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할아버지도 친분이 있는 재력가 몇 분에게 헌금을 요청하는 서찰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어머니의 자서전 <장강일기>를 보면, 이렇게 시작된 첫번째 국내 모금활동을 위해 어머니는 20년 3월 초에 상하이를 출발해 배편으로 신의주 건너편 압록강가에 있는 안둥현(현재의 단둥시)까지 갔다.

안둥에는 이륭양행이란 무역·상선 대리업을 경영하는 아일랜드인 조지 쇼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임정 연통제의 한 거점 노릇을 하여, 할아버지가 망명할 때도 그 회사에서 대리하는 영국계 태고사의 선박을 이용하였다. 백범 김구도 상하이로 망명할 때 쇼의 도움을 받았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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