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0.01.12 20:47 수정 : 2010.01.12 20:47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조지 쇼는 만주 안둥현에서 무역회사 겸 태고선박회사 대리점을 운영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과 연락을 담당했다. 말년에 살던 푸젠성 푸차오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그의 가족사진. 아버지와 아들까지 3대가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8

임시정부는 1919년 창립 직후부터 국내와의 비밀통로로 연통제를 설치했다. 어머니는 상하이에 있는 동안 몇 차례 국내에 다녀왔는데, 최초의 두 번은 이 연통제를 이용했다. 연통제의 다른 통로에 대하여는 별로 아는 것이 없으나, 중국 랴오닝성 안둥(안동)현에서 그 맞은편 신의주로 통하는 길은 들은 바가 많아 익숙하게 느껴진다.

우리 겨레의 참된 벗 중 한 분인 조지 쇼는 안둥현에서 이륭양행이란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2008년 여름, 나는 임정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하는 항일유적지 답사단(독립정신 답사단)과 함께 만주지역의 유적들을 답사하던 중 안둥현에 아직도 그대로 있는 이륭양행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조지 쇼는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으나 영국의 식민지였던 에이레(아일랜드의 옛 이름) 사람이다. 자기의 조국도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우리의 항일독립투쟁을 돕는 마음이 생겼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의 부인은 일본인이었다. 그것도 당시의 서양인이 흔히 갖고 있는 인종적 편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가 경영하는 이륭양행은 홍콩에 본사를 둔 영국계 태고윤선공사의 안둥대리점을 겸하고 있었다. 태고윤선공사는 홍콩의 가장 큰 해운재벌의 하나로 중국과 동남아를 잇는 여객 겸용 수송선 여러 척을 갖고 있었다.

<백범일지>를 보면 백범이 1919년 봄 동지 15명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할 때도 이륭양행의 배편을 이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이륭양행에서 대리하는 배편으로 상하이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니도 연통제의 통로를 이용한 국내 활동을 끝낸 후 이 회사가 대리하는 태고양행계 배를 타고 상하이로 귀환했다.

조지 쇼는 의열단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의열단의 안둥현 거점이 바로 이륭양행 건물 안에 있었던 것이다. 미국 작가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노래>란 책에 항일독립투사 김산의 이런 진술 내용이 들어 있다. “의열단은 여덟 개의 전략적 건축물을 파괴하고 모든 대도시에 있는 일본인 관헌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비밀리에 200개의 폭탄을 한국에 들여왔다. 폭탄은 안동에 있는 영국 회사 앞으로 보내는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 회사 소유의 기선에 실어 상해에서 보냈다. 안동회사의 지배인은 아일랜드인 테러리스트였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그를 ‘샤오’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하였다. 그래서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독립운동을 열렬히 지원해 주었다. 샤오 자신이 상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스스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안동에 있는 그의 집에 숨었다…. 샤오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또 자기 직업을 잃어버렸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그는 상해로 갔으며, 임시정부는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어 그를 환영하였다. ‘샤오’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이런 희생을 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쇼는 1920년 7월 왜경에 잡혀 서울로 압송된 1개월 뒤 ‘내란’죄로 기소되었으나 영국 정부의 항의로 외교적 문제로 비화해 결국 11월 초 보석으로 석방돼 안둥현으로 귀환했다. 그는 안둥에 귀환한 뒤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1921년 1월 하순에는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정에서는 그를 위해 환영연을 베풀었으며, 도금한 공로장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이 공로장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한다.

그러나 쇼는 영·일 정부 사이의 묵계로 부득이 안둥현의 사업을 중단했다. 쇼가 상하이를 떠난 뒤의 소식은 잘 모르겠으나, 중국 동남부의 푸젠성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쇼는 60년대 초 우리 정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나 그의 유족은 찾지 못하였다. 나는 우리 정부가 지금이라도 조지 쇼의 유족을 찾아 90여년 전 만난을 무릅쓰고 우리 독립운동을 도운 그의 공적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