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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13 18:51 수정 : 2010.01.13 23:40

1920~30년대 상하이에서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있던 우승규 기자가 필명으로 펴낸 <나절로 만필>의 표지. 필자의 어머니 수당 정정화를 ‘한국의 잔 다르크’로 소개한 그는 이 책에서도 필자 집안을 소개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9

1920년 3월 초순 상하이를 떠난 어머니(정정화)는 이륭양행을 거점으로 한 연통제의 안둥 책임자 우강 최석순의 도움으로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건너 쉽게 서울행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일제 경찰의 형사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던 우강은 검문소에서 어머니를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말해 통과시켜줬다. 신의주에서는 양복점을 경영하며 연통제의 중요 고리를 맡고 있던 이세창이 서울행 기차에 오르는 데까지 돌봐주었다.

당시 경성역 바로 앞 세브란스병원에는 예관 신규식의 장조카인 신필호가 산부인과 의사로 있었으며, 임정 군무총장 계원 노백린의 딸이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즉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은신처를 마련했다. 이때 모금 대상자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바 없으나, 그중에는 민영달이란 거부가 있었다. 민영달은 합병 당시 작위를 받았으나 훗날 이를 반납했으며, 할아버지와는 상당한 친분이 있었고 민족의식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아일보> 창간과 같은 공개적인 일에는 많은 사재를 내놓았으나 ‘불법단체’인 임시정부에 관련되는 것은 겁이 났는지 돈을 내놓지 않았다.

어쨌든 모금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첫번째 사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원래는 친정아버지를 찾아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이나, 떠날 때 예관에게 받은 지시대로 친정에는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당시 큰오빠 정두화가 대동단 사건으로 옥중에 있어 가족들도 감시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애초 우리 가족과 예관만 알고 있었으나,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온 다음에는 상하이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상하이 유학생으로 <동아일보> 특파원을 겸한 우승규(필명 나절로)는 훗날 당시를 회고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그중 우리 가족과 관련된 것들도 있었는데, 어머니를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까지 표현하였다. 역시 유학중에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던 해위 윤보선도 당시 우리집에 자주 들렀다. 몇십년이 지난 뒤 해위는 전직 대통령의 신분인데도 모임에 어머니가 참석하면 꼭 찾아와 인사를 올렸다. 1970년대 댁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나를 ‘동농 선생의 영포(손자)’라고 소개하자 해위는 “김의한씨의 자제인가” 물은 뒤 “아버님보다도 어머님이 대단한 독립투사지”라며 반겼다.

21년 초여름 어머니는 다시 첫번째와 같은 경로를 따라 두번째 밀파되었다. 두번째 여행에는 예산으로 낙향한 친정집에도 들러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 두번째 모금활동에 대해서도 역시 아는 바는 없으나 금액이 첫번째보다 훨씬 미달이었는데, 이것은 독립의 조기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진 것도 그 원인이었다.

두번째 귀환할 때 어머니는 당시 상하이에 망명중인 서병호 선생의 부인 김구례 여사(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의 언니)와 아들과 함께 왔다. 서 선생의 아들 서재현(서경석 목사의 부친)은 이후 중국에서 일류 기계공학자로 성장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의 국영 병공창(조병창)에서 근무했다. 그는 해방 뒤 해군 준장으로 진해에서 조병창장을 지냈는데, 청렴한 장군으로 소문이 났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그가 예편한 뒤 인천에 있는 국영 기계제작소(대우중공업의 모체) 부사장으로 있을 때 사업관계로 찾아간 적이 있다. 그가 중국에 있었으며, 우사 김규식의 이질이란 말을 들었으므로 내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혔더니 무척 반가워하면서 10대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가던 얘기를 해주었다.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도 그때를 회상하며, 그가 성장한 후의 일은 처음 알게 됐다고 반가워했다.

어머니는 김구례 여사를 통해 그의 두 동생과도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특히 우사의 부인 김순애 여사와는 충칭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했을 때 김 여사는 주석으로, 어머니는 훈련부 주임으로 함께 일하기도 했다. 해방 뒤 귀국할 때에도 함께 충칭을 출발해 상하이까지 동행했다. 귀국 뒤에도 아버지는 우사 선생을 자주 만났으며, 나도 6·25 이전까지는 해마다 빼놓지 않고 우사 내외분에게 세배를 다녔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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