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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시절 의열단, 조선의용대, 민족혁명당 등을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 초대 국가검열상을 지낸 약산 김원봉(오른쪽)과 첫 부인 박차정(왼쪽). 임정이 충칭에 머물던 1940년대 필자 가족과 가까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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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0
1921년 말이 되면서 임시정부의 연통제는 대부분 붕괴된다. 가장 안전한 연결고리였던 안둥현의 조지 쇼가 왜경에 체포되자 연통제 조직이 전혀 가동되지 못했다. 신의주에서 활동하던 이세창도 체포되어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했다. 안둥현에서 활동하던 우강 최석순도 부인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런데 임시정부 경무국은 우강이 왜경의 형사로 일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연통제 요원이었다는 사실은 몰라 그를 체포해 엄히 문초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어머니가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우강은 즉시 석방되었다. 우강은 임정 본부가 난징으로 이전한 뒤 의열단의 상하이 책임자로 있었으며, 의열단이 민족혁명당으로 합병되면서 해방될 때까지 민혁당의 주요 간부로 활약했다. 소속 정당은 달랐어도 우강은 그때 직접 문초를 했던 백범과 언제나 친근한 사이로 지냈다. 두 분 사이의 일을 생각하니 연상되는 일이 있다.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은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왜군 장교로서 참전까지 하였다. 그러고는 조선인 사관학교 동창생들과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모의했으나 행동에 옮길 기회가 없어 혼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지청천은 강을 건너면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청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며 스스로 ‘백산’이란 호를 지어 불렀다. 백산도 그때 독립군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를 맡았던 사람 중에 심광식이란 분이 있었다. 심광식은 그때의 인연으로 나중에 백산의 맏사위가 되었다. 임시정부는 1939년 봄부터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 남쪽 약 100㎞에 있는 치장현(현재는 충칭시 밑에 있는 치장시)에 자리를 잡고 2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충칭 시내에는 38년 말부터 임정 연락사무소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백범과 남파 박찬익, 일파 엄항섭 등은 그때부터 해방 후인 45년 11월까지 계속 그곳에 있었다. 민족혁명당 등 조선민족해방전선계 단체들도 비슷한 시기에 충칭시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이들이 있던 곳은 시내의 창장(양자강 건너편의 난안)이란 지구였다. 아버지 성엄은 41년부터 한국독립당 간부로 일했다. 일본군 비행기의 폭격 때문에 우리 가족을 포함한 임정 가족들 대부분은 강 남쪽 약 30㎞ 떨어진 곳에 있는 투차오란 마을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머니 수당은 자주 시내에 가서 며칠씩 보냈다. 44년 여름부터는 나도 아주 시내로 옮겨갔는데, 그전에는 주로 겨울방학 때만 시내에 가서 세 식구가 함께 지냈다. 난안은 같은 시내이면서도 교통이 불편하여, 우리가 5년 이상 충칭과 그 근교에서 사는 동안 난안에 찾아간 일은 세 번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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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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