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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20 19:11 수정 : 2010.01.20 19:11

1922년 상하이의 프랑스공원에서 필자의 아버지 김의한(왼쪽)과 어머니 정정화, 작은아버지 김용한(가운데)이 함께했다. 할아버지 동농의 장례를 치른 직후여서 아버지의 왼쪽 팔에 검은 띠가 묶여 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14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 지도자, 백야 김좌진 장군은 할아버지(김가진)의 일가 동생이었다. 상하이로 할아버지가 망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 장군이 크게 반겼으며, 백야는 할아버지를 자신이 사령관으로 있는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추대하고 서신으로 자주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만주로 와서 그곳의 항일투쟁을 영도할 것을 권했는데 할아버지의 건강 때문에 성사되지는 못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1922년 무렵 중국 윈난(운남)성에서 군관학교를 나온 시야 김종진과 김노원이 상하이에서 6개월 남짓 함께 지냈다. 나중에 두 사람은 함께 만주로 건너가 백야 장군 휘하에서 활약했는데, 애초 아버지(김의한)와 어머니(정정화)도 이들을 따라 만주로 갈 생각이었다. 아버지보다 약간 연하이면서 아저씨 항렬인 김종진은 그후 백야의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젊은 나이에 만주에서 타계했다. 김노원은 만주에 있다가 귀국해 대전에 살았는데, 해방 뒤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와 나도 인사를 드린 일이 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국제적 지위가 강화되었으며, 대전 이후 호황 덕택에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열강의 지위에 오르게 됐다. 이런 정세 때문에 독립투쟁은 한층 어려운 조건에 몰리게 되었고, 임시정부의 활동도 위축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국내의 조직들은 거의 붕괴되었으며, 만주의 무장항쟁 조직들은 임시정부를 지지했지만 각자 단독으로 투쟁하고 있어 임정의 영향력은 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은 각자 실력을 기르는 노력을 하면서 지냈다. 아버지는 22년 대동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24년에 졸업했는데, 의사 자격을 따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의료보조원을 양성하는 곳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도 어려서 약간의 한문 공부를 했을 뿐인데 상하이에 있는 동안 독학으로 한문을 상당 수준까지 올려 한시 몇 편이 지금도 남아 있다.

어머니가 한문 공부하는 데는 임정 재정부장이었으며 광복 이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세관 유인욱 선생에게 영어도 배웠다 한다. 어머니는 내가 중국에서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미리 공부하여 중학교 시절 내 영어 공부를 지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24년말께 어머니는 다섯번째로 귀국했는데, 당시 여권을 가지고 있어 여행에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 와서 휴식을 좀 취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어머니는 6개월 동안 대부분을 예산의 친정에서 책이나 읽으며 보냈다 한다. 친정아버지 생전에 받았던 정도는 아니었지만, 큰오라버니의 도움으로 왕복 여비와 체류 비용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는 25년 6월 다시 상하이에 돌아와 앞서 말한 세관 선생의 알선으로 외국인이 경영하는 혜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도 마치기 전에 아랫배가 심히 아파 학업을 중단하고 자궁 수술을 받았다. 그때 수술이 잘된 덕분에 3년 뒤 나를 임신하게 됐다고 한다. 고정된 일 없이 6~7년을 보낸 끝에 아버지는 26년초 상하이에 사는 동안 처음으로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됐다. 영국계 ‘공공기차공사’라는 곳이었다. 이때부터 32년 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로 상하이를 떠날 때까지 5년 남짓 기간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으며, 작은 금액이지만 고국의 할머니에게 송금도 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3·1봉기 이후 일본은 제1차 대전 이후 국제적 분위기에 맞추어 이른바 ‘문화통치’로 민심을 어느 정도 수습하는 방향으로 식민지배를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앞서 말한 20년 ‘경신참변’ 때 간도지역 조선인 학살에 이어, 23년 9월 간토(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관의 사주 아래 조직된 ‘자경단’이 앞장서서 우리 동포 1만여명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은 물론 국제사회에 알려졌으나 일시적인 언론 보도와 비난에 그치고 말았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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