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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에 파견된 한국 대표단.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병구·정한경·유경상·임병직·이살음·이승만·송헌주. 임시정부는 미국의 반대로 공식 초청을 받지 못했고, 대신 구미위원회 인사들이 참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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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7
앞 회에서 얘기한 알저 히스는 1942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보좌관으로 있었을 뿐만 아니라, 45년 초의 얄타회담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그해 4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는 국제연합 임시사무총장까지 지냈다. 유엔 창설을 위한 이 회의에는 독일에 점령당한 유럽 국가들의 런던 주재 망명정부 대표들도 참석했다. 임시정부에서도 이 회의 파견을 위해 김규식 박사를 수반으로 한 대표단을 구성했고, 중국 정부에서 여비 지원까지 책정하였으나 미국의 반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승만 박사가 자신보다 미 국무부와 더 잦은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김용중·한길수 같은 이들과 협력해서, 적어도 미국의 한인들만이라도 단결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박사가 42년 초에 만났던 히스는 미국에서 반공·반소 히스테리가 고조되기 시작한 50년대 초 위증죄로 5년형을 선고받아 3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그는 국무부 비밀문서를 전 공산당원인 체임버스에게 넘겨준 사실을 부인해 ‘위증 혐의’로 처벌받았다. 본인은 출옥 뒤에도 무죄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이 재판의 공정성을 둘러싸고 70년대 후반까지도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그러나 그가 2차대전 중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명백했던 까닭에, 그런 사람 앞에서 이 박사가 소련을 비난한 것은 외교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서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43년 여름 루스벨트 대통령은 카이로회담에 앞서 워싱턴에서 쑹쯔원(송자문) 중국 외교부장에게 한국 저항세력에 대한 지원 가치를 문의했다. 당시 이미 충칭에서는 임정 산하로 모든 항일세력이 다 통합돼 있었다. 쑹 부장은 이 박사에게 한길수 등과 협조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 박사는 ‘한길수는 가치가 없는 상대’라고 일축했다. 이 때문에 결국 쑹 부장은 루스벨트에게 한인사회가 너무 분열된 상태로서 지원할 가치가 없다고 보고하게 됐다. 이 박사를 만난 뒤 쑹은 본국 정부와 상의 없이 이런 결론을 내린 듯하다. 애석한 일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도 기습작전으로 기선을 잡은 일본은 2차대전 개시 6개월 동안 승승장구했다. 일본 항공기는 41년 12월7일 진주만 공격이 개시된 직후 영국령 홍콩과 그 바다 건너의 주룽(구룡)반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이어 중국 광둥성에 주둔하던 육군이 주룽반도를 향해 진격해 약 2주 뒤 결국 영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홍콩을 완전 점령했다. 그리고 말레이반도·싱가포르·필리핀·인도네시아 등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12월에는 타이 정부의 항복을 받아 영국령 버마(미얀마)를 공격할 수 있게 됐다. 미얀마 공격은 수도인 랑군(양곤)에 대한 상륙작전으로 전개됐는데, 이로써 랑군~쿤밍 공로가 차단되어 중국의 육로 지원이 끊기게 됐다. 그리고 태평양에서도 서쪽으로 웨이크섬(미국령)·마셜제도에서 동남으로는 비스마르크제도를 제압하고 솔로몬제도의 상당 부분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뉴기니섬도 반 이상 점령했다. 북쪽으로는 알류샨열도의 서단에 있는 섬 몇 개까지 쉽게 차지했다. 그러나 개전 초기와 같은 일본의 일방적 승리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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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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