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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10 18:44 수정 : 2010.03.10 22:14

1945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에 파견된 한국 대표단.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병구·정한경·유경상·임병직·이살음·이승만·송헌주. 임시정부는 미국의 반대로 공식 초청을 받지 못했고, 대신 구미위원회 인사들이 참관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7

앞 회에서 얘기한 알저 히스는 1942년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보좌관으로 있었을 뿐만 아니라, 45년 초의 얄타회담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그해 4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는 국제연합 임시사무총장까지 지냈다. 유엔 창설을 위한 이 회의에는 독일에 점령당한 유럽 국가들의 런던 주재 망명정부 대표들도 참석했다.

임시정부에서도 이 회의 파견을 위해 김규식 박사를 수반으로 한 대표단을 구성했고, 중국 정부에서 여비 지원까지 책정하였으나 미국의 반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승만 박사가 자신보다 미 국무부와 더 잦은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김용중·한길수 같은 이들과 협력해서, 적어도 미국의 한인들만이라도 단결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 박사가 42년 초에 만났던 히스는 미국에서 반공·반소 히스테리가 고조되기 시작한 50년대 초 위증죄로 5년형을 선고받아 3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그는 국무부 비밀문서를 전 공산당원인 체임버스에게 넘겨준 사실을 부인해 ‘위증 혐의’로 처벌받았다. 본인은 출옥 뒤에도 무죄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이 재판의 공정성을 둘러싸고 70년대 후반까지도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그러나 그가 2차대전 중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명백했던 까닭에, 그런 사람 앞에서 이 박사가 소련을 비난한 것은 외교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서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43년 여름 루스벨트 대통령은 카이로회담에 앞서 워싱턴에서 쑹쯔원(송자문) 중국 외교부장에게 한국 저항세력에 대한 지원 가치를 문의했다. 당시 이미 충칭에서는 임정 산하로 모든 항일세력이 다 통합돼 있었다.

쑹 부장은 이 박사에게 한길수 등과 협조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 박사는 ‘한길수는 가치가 없는 상대’라고 일축했다. 이 때문에 결국 쑹 부장은 루스벨트에게 한인사회가 너무 분열된 상태로서 지원할 가치가 없다고 보고하게 됐다. 이 박사를 만난 뒤 쑹은 본국 정부와 상의 없이 이런 결론을 내린 듯하다. 애석한 일이었다.

태평양 전선에서도 기습작전으로 기선을 잡은 일본은 2차대전 개시 6개월 동안 승승장구했다. 일본 항공기는 41년 12월7일 진주만 공격이 개시된 직후 영국령 홍콩과 그 바다 건너의 주룽(구룡)반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이어 중국 광둥성에 주둔하던 육군이 주룽반도를 향해 진격해 약 2주 뒤 결국 영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홍콩을 완전 점령했다. 그리고 말레이반도·싱가포르·필리핀·인도네시아 등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12월에는 타이 정부의 항복을 받아 영국령 버마(미얀마)를 공격할 수 있게 됐다. 미얀마 공격은 수도인 랑군(양곤)에 대한 상륙작전으로 전개됐는데, 이로써 랑군~쿤밍 공로가 차단되어 중국의 육로 지원이 끊기게 됐다.

그리고 태평양에서도 서쪽으로 웨이크섬(미국령)·마셜제도에서 동남으로는 비스마르크제도를 제압하고 솔로몬제도의 상당 부분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뉴기니섬도 반 이상 점령했다. 북쪽으로는 알류샨열도의 서단에 있는 섬 몇 개까지 쉽게 차지했다. 그러나 개전 초기와 같은 일본의 일방적 승리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해 미-일 전쟁이 터졌을 때 충칭의 한인사회에서는 누구나 “이제는 일본이 망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고무돼 있었다. 개전 초기에 좋지 않은 보도들이 나와도 전세가 곧 반전되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전쟁 반년이 돼가도록 태평양에서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계속 전해져왔다. 물론 임정에서는 연합국의 종국적인 승리를 확신했으나 우선 답답한 심정이야 어쩔 수가 없었다.

국내의 사정은 더욱 어두워지기 마련이었다. 전시체제 아래서 일제의 압박과 수탈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언젠가 밝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로 식민지배자들과 협력을 거부하던 지식인과 사회 지도자들 중에서는 일제의 한층 심해지는 압박과 해방의 희망이 더욱 멀어져 보이는 상황에 굴복, 변절해 그들에게 협력한 자들이 늘어났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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