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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17 19:18 수정 : 2010.03.17 19:18

1905년 8~9월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일본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의 세르게이 비테를 비롯한 두 나라 대표들이 러일전쟁 강화회담을 열고 있다. 이 조약 주선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듬해 일본과 ‘필리핀과 조선 지배’를 상호 동의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2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 앞서, 미국이 필리핀에 독립을 약속하고 40년 이상 교육(후견)했으나 아직도 독립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데, 하물며 40년 가까이 일본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이야 당연히 후견기간을 거쳐야 된다는 주장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루스벨트는 이처럼 한국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에 대한 주장도 진실을 외면한 자기정당화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기만적인 생각이었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필리핀을 양도받았다. 스페인의 식민정책 가운데 하나는 피식민지 인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400년 가까이 필리핀을 통치하는 동안 토속신앙이 중심인 북부 주민들은 대부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이슬람교가 뿌리박힌 남부에서는 개종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서는 스페인 통치에 대한 저항이 거의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다 민중의 각성도가 높아지면서 1896년부터 북부에서도 대규모 독립투쟁이 전개됐다.

이런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필리핀이 미국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다. 새 지배자가 온 뒤에도 혁명은 지속되었다. 미국은 무력진압과 함께 자국이 전통적인 식민국가가 아니라는 점을 내세워 적당한 시일 안에 필리핀을 독립시켜 준다고 약속해 독립투쟁을 무마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거짓 약속을 내세워 필리핀을 안정시킨 공적으로 1904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총독은 육군부 장관까지 겸임했다.

1905년 9월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러일전쟁이 끝났다. 바로 이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조선반도와 만주에서의 모든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바람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다. 러일회담은 그해 6월부터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열렸으며, 다음달인 7월29일 태프트 육군장관은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병탄을 승인한 것이다. 그리고 포츠머스조약 체결을 불과 3주 앞두고 영국과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미·영·일 3국의 야합 속에 우리의 운명이 결정됐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장래를 다룬 카이로선언에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이런 역사에 대한 의식도 없이 스스로 식민지 해방 운동가처럼 행세하며 또한번 한국의 운명을 자의대로 규정해 한국을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일’ 대신 ‘적당한 시기’ 혹은 ‘적당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시킨다는 조항을 넣어 한반도에 분단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41년 11월, 임시정부는 창설 1년2개월 만에 광복군을 어쩔 수 없이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 후 2년이 지나는 동안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지원은 충분치 못하면서도 그들 특유의 관료적 통제 때문에 광복군의 활동도 부진한 상태가 계속됐다. 이에 임정은 43년 초부터 광복군을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는 ‘9개 준승’을 철폐하고 독립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 군사위원회는 우리의 이런 요구에 오래도록 불응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43년 가을에 이르러 임정에서 ‘9개 준승’을 일방적으로 폐기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게 되자 중국 국민당 쪽도 해결책을 강구해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다. 이 문제 때문에 여러 해에 걸쳐서 다져온 두 정부 사이의 우호관계까지 손상되는 것을 우려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국 정부는 44년 4월13일 ‘한국 문제 처리 원칙’을 세웠는데, 그 첫째 항은 “한국 문제에 대해 구체적 방안을 결정하고, 수시로 미국과 상의한다”고 되어 있다. 중국으로서는 그때 ‘대일 항전체제’를 유지하려면 미국의 영향력이나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카이로선언이 나오기 4개월 전, 연합군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에 상륙해 남부 유럽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렇게 연합국은 태평양·동유럽 및 지중해 지역에서는 계속 승리를 구가하고 있었으나 오직 중국 전선만이 교착되어 일본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형세였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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