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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12월12일 중국 난징 근처 창강에 정박해 있던 중 일본 항공기의 폭격을 받아 침몰당한 미 해군의 ‘유에스에스 페나이호’. 일본에 의한 최초의 미군 희생자를 낸 이 사건은 태평양 전쟁의 예고편으로, 미국이 중국 국민정부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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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3
중국 국민정부는 1932년 이후 계속해서 우리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때로는 일본의 눈치를 살피면서 비공식적인 지원을 했고, 전쟁 개시 뒤에는 더 정규적으로 지원을 했다. 물론 우리의 기대보다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광복군의 통수권 문제 등 심각한 갈등도 있었지만 어쨌든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특히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 주석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당시 중국 국민당과 중앙정부의 실태 가운데는 제대로 알고 지나가야 할 점이 많다. 25년, 후일 중국의 국부로 숭앙받게 된 혁명 영도자 쑨원이 별세한 뒤 그가 창립한 국민당의 당권을 장악한 우파들은 사실상 쑨원의 진보노선과 배치되는 길을 걷었다. 그들은 표면상 끝까지 삼민주의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극우정치를 펼쳐나갔다. 27년에는 쑨원의 국공합작을 폐기했으며, 공산당뿐만 아니라 진보세력 전체에 압력을 가했다. 36년 말 시안사변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을 이뤄, 함께 일제의 침략에 대처하긴 했다. 하지만 국민정부 통치 지역에서는 여전히 공산당과 맞섰다. 전쟁중 중국의 병력은 300개사(사단) 규모였고, 1개사는 9000명이었으므로 270만의 군사력을 보유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 병력은 겨우 3분의 2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선 사단에서 병사 수를 늘려 중앙에서 내려오는 봉급과 군수물자를 더 받아먹었던 것이다. 그러니 전투력도 저하되지 않을 수 없었다. 40년 이후 전선이 대체로 안정된 것도 방어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선의 확장에 따라 일본군이 계속 전진할 여력이 둔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창장강 중류의 이창전투 때처럼 일본군은 쉽게 싼샤(삼협) 바로 앞의 이창까지 진격해 함락시켰으나 얼마 뒤 스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 보급로를 줄이기 위한 후퇴로 보이는데, 이럴 때마다 중국 정부는 반격해 적을 격퇴시킨 것처럼 전과를 과장해 선전했다. 그러면 미국의 매체들은 전선에 나가 직접 취재를 하지 않고 중국 쪽 발표를 그대로 타전해 중국군의 승리를 보도했다. 이렇게 하여 중국군의 작전능력에 대해 일반 국민뿐 아니라 미국 정계에서도 지나친 평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6년 넘는 중일전쟁 동안 제대로 된 승리는 거의 없었고, 중국군은 공격 의지를 완전히 잃은 형편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뒤 미국은 버마(미얀마)를 통해 다량의 물자를 중국에 공급했다. 그러나 그 지원은 일본군의 랑군 점령으로 중단되었다. 버마로부터의 육로 보급이 끊어지자 중국과 외부의 연락은 항공편으로만 유지되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인도 동북부 아삼지구의 비행장으로부터 중국 남부 윈난성 쿤밍까지 수송기 25대만 운행할 뿐이었다. 한 대가 1회에 4t을 적재할 수 있으므로, 수송기가 한달 동안 10차례씩 왕복한다 해도 1000t의 물자를 운송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당시 상황에서는 최대한의 수송물량이었을 것이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대추축국 전쟁에서 미국의 우선순위는 유럽이었으며, 그때 서유럽의 제2전선 준비에 바쁜 상황이어서 더 많은 수송기를 단시일 안에 태평양 쪽으로 투입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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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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