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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8월 인도 주둔 영국군총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파견된 광복군 인면(인도·버마)전구공작대.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 최봉진·김상준·나동국·박영진·송철·김성호·이동수 등 모두 9명으로 구성된 공작대는 미얀마 국경 임팔전투에서 영국군 제17사단을 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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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4
1942년 3월 버마 랑군을 무혈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해상 수송로가 막힌 이후 연합군 시비아이(CBI, 중국·버마·인도)전구사령부에서는 중국으로의 새로운 수송로를 개척하고자 북부 버마 탈환계획을 세웠다. 인도 아삼주 동북부의 레도로부터 동남쪽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치나를 통과해 중국 윈난(운남)성 서부에서 옛 버마-윈난포까지 연결해 새로운 ‘북부버마공로’를 개척하는 작전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이 작전은 미·영·중 3국의 합동작전으로 계획됐다. 영국군은 인도 아삼주 마니푸르 지방의 임팔로부터 친드윈강 쪽으로 동진작전을 전개한 뒤 일본군의 저항 정도에 따라서는 버마 남북을 종단하는 철도까지 진격할 전략이었다. 중국군은 윈난성 서부를 점령한 일본군을 공격해 미치나를 최종 목표로 삼고 있으나, 역시 견제 기능을 하는 정도의 국한된 목적이었다. 주력군은 인도 아삼주 동북부의 레도로부터 중·미 연합군이 험준한 산령과 정글을 거쳐 미치나 공군기지를 향해 진군하기로 했다. 중국군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중국 정부는 3개사(사단)를 미군 지휘하에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인도 아삼주의 람가에서 미군에 의해 재정비와 훈련을 받도록 했다. 그뒤 실전에서 보인 바와 같이 중국군도 제대로 훈련받고 지휘를 받으면 훌륭한 군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당시 이 계획의 총사령관인 미국의 조지프 스틸웰 장군의 소신이었다. 그리고 윈난에서의 공격을 맡은 2개군(군단)에게는 더 나은 장비와 보급이 이뤄졌다. 전투는 우기가 끝나는 43년 11월쯤 개시해, 이듬해 우기가 오기 전인 5월까지 미치나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 건설과 전투지원의 비행장 건설은 전선 바로 뒤에서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동원될 연합군의 총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미치나를 공격하는 중·미 연합군은 3만~3만5000 정도였다. 중국 국민정부가 약속한 3개사의 병력은 2개사 반 정도만 파견되었다. 중국군은 람가 훈련소에서 각 1만2000명의 2개사로 재조직되었으며, 여기에는 미국 고문관이 대대급까지 파견되어 있었다. 스틸웰이 직접 지휘하는 ‘북부전투지구사령부’(NCAC)가 레도 동남부 미치나 공군기지를 향한 공격을 맡았는데, 훈련을 받는 중국군의 파견이 늦어져 결국 12월 하순에야 버마 공격을 개시했다. 미얀마 중부를 향해 지원공격을 맡은 영국군은 여러 가지 구실로 공격 개시를 지연시켰다. 사실 영국은 북부 버마 탈환작전에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지원 자체를 탐탁잖아했다. 영국의 판단은 중국이 어쨌든 연합군 전선에서 탈퇴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았다. 영국은 무엇보다도 전후에도 동남아시아 일대의 과거 식민지를 확보해야겠다는 야망이 앞섰으며, 중국이 전쟁에서 주도적인 활약을 하게 되면 전후 발언권이 커질 것을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 광복군은 43년 8월 9명으로 구성된 인도파견공작대를 보냈다. 그 구성원은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 최봉진·김상준·나동국·박영진·송철·김성호·이동수였다. 대장 한지성과 대원 이동수 두 사람은 조선의용대에서 광복군으로 편입된 제1지대에서 차출됐으며, 나머지는 제2지대에서 뽑혀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뒤 캘커타로 파견되었다. 광복군의 인도파견공작대는 임팔로 가서 중국 전선에서 활약한 조선의용대와 마찬가지로 대적선전, 문서번역, 포로심문 등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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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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