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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28 18:30 수정 : 2010.03.28 18:30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듬해 의사의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대부분 이주했다. 왼쪽 사진은 부친 안태훈과 동생 정근·공근, 오른쪽은 부인 김아려와 둘째 아들 준생, 러시아에서 숨진 맏아들 분도의 모습.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9

1919년 10월 하얼빈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안중근 의사의 유족을 상하이로 오도록 했으나 그들의 생활에는 전혀 보탬을 주지 못했다. 그나마 유족들은 중국 각계의 지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 산둥성에 있는 독일의 자오저우만(칭다오시 일대) 조차지를 점령했으며, 전후 여기에 대한 조차권을 계승받았다. 중국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전쟁에 기여한 바가 없어 승전국 대우는 전혀 받지 못했다. 자오저우만을 점령한 일본은 나아가 군대를 산둥반도 여러 지역에까지 파견해 주둔하고 있었다. 때문에 1919년 3·1운동에 이어 5월4일 베이징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생시위인 5·4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의 주된 대상은 일본이었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중국인들은 하얼빈 의거를 높이 평가했으며 유족들에게도 배려를 했던 것이다.

안 의사의 큰아들 분도는 의거 이후 어린 나이에 러시아 땅에서 숨졌다. 그래서 상하이에 온 가족은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 딸 현생, 러시아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준생 등 모두 넷이었고, 이미 분가해 가정을 꾸리고 있던 정근·공근 두 형제도 이때 함께 왔다.

그 무렵 할아버지(김가진)가 별세한 뒤 우리집에는 백범 일가가 이어서 살고 있었다. 일찍이 동학 접주 시절 백범이 안 진사 댁에 의탁했던 인연으로 조 여사는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자주 찾아왔으므로, 거기서 내 어머니(정정화)와도 만나 친분을 쌓았다.

안 의사 집안 전부가 상하이로 이주했지만 시집간 안누시아 여사만은 남편 권승복 선생, 아들 권헌과 함께 만주에 남아 있었다. 독립군의 일원인 권 선생은 1920년 만주에서 순국했다. 안 여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독립군 뒷바라지를 하며 지내다 31년 일본의 만주 강점 이후 왜경에 잡혀가는 탄압을 받으며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안 여사는 만주를 떠난 뒤 해방될 때까지 중국 허베이성 일대를 유랑하며 고생스러운 생애를 보내다가 귀국하여 54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병사했다.

조마리아 여사는 27년 7월 상하이에서 별세해 프랑스 조계 안의 외국인 묘지인 징안쓰(정안사) 만국공묘에 묻혔다. 이 묘지는 현재 도시 개발로 사라졌다. 50년대 말로 기억되는데, 홍콩에서 발간되는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라는 영어 일간지에 상하이시 정부가 외국인 유족들에게 묘소 이전을 요청하는 광고가 난 것을 본 일이 있다. 그 뒤 당시 상하이에 살았던 교민들로부터 교민회가 주동이 되어 항일투사들의 유골을 화장 처리해 쉬자후이 만국공묘(현재의 쑹칭링 능원)로 이장했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때 조 여사와 혁명지사 유해 몇 분은 빠뜨렸던 것 같다.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포섭하고, 때로는 첩자로 만들고자 꾸준히 노력했으나 별로 성과는 없었다. 대신 항일투사들의 자제들을 포섭한 사례는 있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32년 11월 일본 점령하 만주의 지하공작을 위해 다롄항에 도착하자마자 대기중인 일경에 체포당해 순국했다. 이규서와 염충열의 밀고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규서는 우당의 조카이며 염충열도 항일운동가의 아들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안 의사가 순국한 뒤 딸 현생과 아들 준생은 상하이에서 공부를 했으며 성장했다. 두 자녀와 사위도 일본인의 포섭 대상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혁명가의 자녀들을 포섭할 때는 중국인 한젠(漢奸-한족의 역적이란 뜻)을 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머니가 이규서와 염충열이 상하이에 있을 때 유흥업소를 자주 드나드는 것이 마땅치 않아 직접 탓한 일이 있는데, 중국 친구들과 어울려서 그런 것이니 ‘걱정 마시오’라고 대답했다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백범은 난징에 있을 때, 안공근 선생에게 상하이에 있는 안 의사 가족들을 모두 데려오라고 했는데, 공근 선생이 자기 식구만 데리고 와 심한 꾸지람을 했다. 공근 선생이 그때 조카들과 조카사위가 의심이 들어 일부러 형수(김아려)를 찾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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