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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의 든든한 오른팔로 활약하다 1939년 충칭에서 돌연 실종된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 공근 선생이 36년무렵 난징 인근의 전장(鎭江)에서 한국국민당 간부들과 함께 했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엄항섭 양우조 김붕준 안공근 차이석 조성환 조완구 이동녕(앞은 엄항섭의 둘째딸 기순) 김구 이시영 송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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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2
백범 선생은 1945년 11월 귀국 뒤 명동의 성모병원에서 탈장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퇴원 뒤에도 당시 병원장이었던 박병래 박사가 치료 관계로 경교장에 자주 들렀다. 박 원장은 백범을 존경했으며, 그 일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박 원장은 국사에 바쁜 노인이 아들 며느리도 없이 직접 어린 손녀를 돌보는 것을 보고 효자를 대신 양육할 것을 제안했다. 박 원장에게는 효자와 같은 또래의 애들도 있어 함께 지내면 좋겠다는 뜻도 전했다. 그리고 효자의 외가도 가톨릭 집안이니 신자인 자신에게 맡기는 것은 며느리 안미생도 찬성할 것으로 생각해, 이때부터 박 원장은 효자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딸처럼 데리고 살았다. 김신 형에게 듣기로, 자신이 60년대 초 주타이완 대사로 있을 때 이화여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효자를 타이베이로 데려와 2년간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60년대 중반 미국에 있는 형수(안미생)의 요청으로 유학을 보냈으며,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뒤 소식이 아주 끊겼다 한다. 김신 형은 그 뒤에도 미국에 갈 기회가 여러 차례 있어 형수와 조카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노력했으나 전혀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미생이 다니던 뉴욕의 가톨릭 성당에 가서 물어봐도 모두 소식이 끊어졌다는 말만 들었다 했다.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 공근 선생은 상당히 적극적인 성품이었다. 30년대 초에는 백범 선생의 오른팔이라 할 정도로 가장 신임받는 동지였다. 백범은 현상금이 걸려 있어 활동이 부자유스러웠으며, 중국어도 서투른 편이어서 공근 선생 같은 사람의 도움이 더욱 필요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거사 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분풀이도 해줬다며 고맙게 생각했으며, 임시정부 특히 백범에게 상당한 성금을 기부한 이들도 많았다. 이 성금을 공근 선생이 사사로이 챙기고 사용했다는 물의가 있어 선생은 부득이 난징을 떠나 홍콩에서 얼마 동안 체류했다. 공근 선생은 상하이에 있을 때부터 국민당 조사통계부와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며, 홍콩에서도 그런 관계가 유지된 것 같다. 그는 39년 역시 국민당을 통해 가족들을 데리고 충칭에 왔다. 그런데 며칠 뒤 충칭에서 실종됐다. 이 사건은 사실상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다. 중국 공안당국이 이 사건을 일본과 중국 이중간첩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주범으로 지목된 중국인이 영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확고한 증거가 없어 기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 한인 청년들이 충칭에서 개업중인 한인 의사 유진동 선생의 병원으로 공근 선생의 시신을 들고 왔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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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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