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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45년 임시정부 충칭 시절 외무차장 겸 주석 판공실장을 지낸 석린 민필호(왼쪽). 임정 초대 법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예관 신규식(오른쪽)의 비서이자 사위이고,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그의 맏사위다. 필자는 당시 임정 시무 보조를 하며 석린의 사무실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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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7
1944년 가을 학생의용군 입대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김의한)는 나에게 고중 졸업 전이라도 만 18살이 되면 광복군에 입대시켜 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그때가 되면 틀림없이 또 고중이나 졸업하고 가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없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창피해서 장진의 제9중학으로는 다시 못 돌아가겠다고 고집했다. 부모님도 이듬해 9월 고중에 입학할 수 있도록 공부나 하라고 해, 제9중학으로는 다시 복귀하지 않고 말았다. 앞서(47회) 얘기했던 것처럼, 조선의용대원들이 41년 봄 대거 공산군 세력권으로 이탈한 뒤 중국 정부의 약산 김원봉에 대한 신임은 큰 손상을 입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용대는 해체돼 광복군으로 편입하게 됐다. 42년 4월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재편됐으며, 지대장은 약산이 맡았다. 그리고 다음달 광복군은 직제를 변경해 약산이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이어 조선민족혁명당 등 그동안 임시정부에 관여하지 않았던 각 당파의 임정 참여가 실현돼 나갔다. 42년 10월25일 제34차 임시의정원 정원 48명 가운데 결원인 23명의 보선이 있었다. 이때 한독계에서도 아버지가 새로 선출됐으나 의원 자리의 상당수는 민족혁명당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국무위원도 9명을 11명으로 늘리면서 민혁당 출신 우사 김규식 박사가 부주석, 소해 장건상 선생이 새로 국무위원에 임명됐다. 43년 10월에 있었던 제35차 의정원 선거에서는 한독계 24명, 민혁계 12명, 기타 각 당파 12명이 당선됐다. 아버지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선됐다. 그리고 국무원도 확장해 약산이 군무부장, 소해가 교육부장, 영주 김상덕이 문화부장 등에 취임함으로써 민혁당이 연립내각에 참여하게 됐다. 이때까지 주로 한독당의 조직부 주임 등을 맡으며 당무에만 종사했던 아버지는 의정원 의원으로서 외교위원회와 선전위원회 위원을 맡아 업무가 늘어났다. 그러던 중 45년 5월1일에는 광복군 정령(대령)으로 정훈처 선전과장 일까지 맡게 됐다. 아버지는 광복군 창립 당시부터 관여했는데, 본부를 시안으로 옮길 때 잠시 실무에서 떠났다. 이후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9개 준승’이 수락되자 아주 사표를 내고 말았다가 ‘준승’이 폐기되면서 다시 복귀한 것이다. 광복군 간부는 거의 전원이 독립군 혹은 중국군 경력자였는데, 고급장교로는 아버지 외에 양우조·조시원 선생과 여성인 김윤택 교수만이 민간인 출신이었다. 두 분도 정령이었다. 당시 한독당에는 김구 중앙집행위원장 밑에 조직·훈련·선전·조사·재정 5개부가 있었으나, 사실상 당무의 대부분을 조직부 주임인 아버지가 맡고 있었다. 나는 고중 진학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한편 미국에서 생활했던 양우조 선생과 권일중 선생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그러면서 한독당 사무실이 바로 내 서재도 되는 형편이었으므로 자연스레 당무도 돕게 됐다. 나는 당사에서 구독하는 중국의 주요 일간지에서 참고될 만한 것들을 추려 매일 스크랩하는 일을 전적으로 맡았다. 내가 제법 일을 잘 처리했으므로 아버지는 당무의 상당 부분을 나에게 맡겼다. 나는 이 일들에 보람을 느꼈으며, 그 일이 고중 진학 공부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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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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