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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옛소련(우크라이나) 얄타의 리바디아궁전에서 ‘제2차 대전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 소련 최고인민위원. 아래 사진은 당시 얄타회담 소식을 보도한 <뉴욕 타임스>의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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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68
1945년 1월25일 인도~버마~윈난 공로가 공식 개통됐다. 중국에서 이날은 국경일이나 다름없었다. 인도 서북부를 떠난 첫번째 ‘호송대’(콘보이)가 쿤밍에 도착하던 날, 수만명의 시민이 열을 지어 들어오는 수백대의 미제 트럭과 지프차의 행렬에 환호했다. 쿤밍에는 피란 온 대학들의 연합체인 서남연합대학이 있었는데, 우리 유학생들도 있어 이 환영의 대열에 참가했다. 중국 항공대에 입대해 미국으로 훈련을 받으러 가는 도중 쿤밍에서 인도로 가는 항공기를 기다리던 백범의 차남 김신 형도 그때의 광경을 보고 감격했다는 말을 나에게 한 적이 있다. 버마~윈난 공로가 끊긴 이후 그때까지 중국은 항공로만으로 외부와 연결돼 있었다. 트럭과 버스는 거의 알코올이나 목탄(숯)으로 운행됐다. 승용차는 귀물이었으며 수송기로 보급된 지프차도 고급 장성들이나 탈 수 있었다. 우리가 광시에서 쓰촨까지 타고 간 버스도 목탄차였다. 그래서 요즘이라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1주일이나 걸렸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44년 12월, 독일군은 연합군 항공기의 활약이 불리한 악천후를 이용해 기습반격으로 벨기에 전선에서 한때 연합군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말에 이르러 독일군은 패퇴하고 연합군의 진격이 다시 개시됐다. 미·영의 폭격기가 독일의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연일 맹폭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부전선은 독일 국경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도 소련은 독-소 전쟁 이전에 갖고 있었던 모든 지역을 탈환하고,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문턱까지 도달했다. 태평양 전선은 아직 끝날 때까지 많이 남았으나 승부는 분명해져 있었다. 사이판섬으로부터 미 B-29 폭격기가 연일 출격해 일본 동남부 주요 도시와 그 근처의 군수공장 및 군수시설에 폭탄을 퍼부었다. 사이판은 일본 본토와 2400㎞ 정도 떨어져 있어 폭격기의 활동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연합군은 좀더 가까운 이오지마섬을 점령해 폭격기 기지로 이용할 목적으로 1월 초 거의 매일같이 해·공군을 동원한 공격을 하고 있었다. 중국 동남부에서 마지막 위세를 떨치던 일본의 공격도 이제는 제풀에 지친 듯 스스로 후퇴하고 있었다. 덕분에 충칭 시민들은 다시 안심하고 지낼 수 있었다. 45년 2월 초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 얄타에 모였다. 훗날 ‘얄타회담’으로 불리게 되는 이 회의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승리를 앞둔 유럽에서의 전후처리 문제였다. 이 회의에서 3국 수뇌는 독일을 분할점령하고, 독일의 군수산업은 폐쇄 또는 몰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요 전범자들을 국제재판에 회부한다는 것도 합의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분할점령하는 것 외에 동유럽과 그리스를 뺀 발칸반도는 소련군이 진주하기로 했다. 이 회담의 또 한 가지 중요한(당시에는 공포되지 않은) 의제는 소련의 대일본전쟁 참여 문제였다. 소련은 당시 일본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이 협상은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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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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