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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7일 김구 주석은 중국 시안에 주둔중이던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서 미국 대표인 전략사무국(OSS) 쿤밍(곤명)본부 지휘관 도너번 소장을 만나 대일본 군사공동작전에 합의했다. 왼쪽부터 엄항섭 임정 선전부장, 백범,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 제2지대장, 도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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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2
1944년 6월 연합군이 프랑스 해안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드디어 유럽에서 제2전선을 전개, 독일에 빼앗긴 지역 거의 모두를 탈환한 소련과 함께 독일을 양면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독일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일본만이 골칫거리였다. 명실공히 연합군의 합동전이 펼쳐지고 있던 유럽전선과 달리 아시아·태평양전선, 특히 태평양에서는 미군의 단독작전이었다. 그해 초여름 미군은 사이판섬을 점령, 일본 본토를 제압하는 B-29 폭격기 기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국은 사이판에서 얻은 교훈으로 일본 본토 공격의 어려움과 희생을 감안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었으며, 더구나 소련이 동의할 것인가도 확인이 안 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을 일단 단독으로 진행해야 할 처지였다. 물론 본토 공격작전 진행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이 구상되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한반도 상륙 공격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만 점령하면, 일본은 철강 등 전략물자 원료의 공급이 차단되고 식량도 부족해질 것이 명백했다.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은 정보수집과 적후방의 파괴 및 유격전 등을 주관하는 전략사무국(OSS)을 운영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략사무국의 중국지부를 통해 44년 초부터 한반도 침투작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임시정부와 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제의 한반도에 대한 압제와 수탈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일제는 조선 청년을 일본군으로 편입해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은 우리 국민에 대한 불신 때문에 조심스럽게 추진했던 것 같다. 일제는 우선 38년부터 ‘특별지원병’이란 명목으로 조선인 지원자를 모집했다. 이때 지원병은 주로 회유와 설득에 의존,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린 소작농들을 대상으로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광복군을 창건하면서 이런 ‘지원병’들이 탈영해 광복군으로 넘어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전쟁으로 인력난이 심해지자 일제는 43년 이른바 ‘학도지원병’ 모집제를 공표했다. 이렇게 해서 대학 또는 전문학교 재학생과 그해 졸업생 4500명 정도가 ‘지원입대’를 했다. 실제로 자원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강압으로 입대한 것이다. 이들은 당시 조선 청년의 정수였으며, 민족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이것이 광복군에게는 모병의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항일전 당시 적후방이면서 국민정부 치하인 지역이 많이 있었는데, 안후이성 북부의 푸양(부양)현도 그런 지역 중의 하나였다. 광복군은 42년 4월 초모공작을 위해 징모처 제6분처라는 명칭 아래 백파 김학규 주임과 대원으로 신송식(진경성)·김광·오광심·지복영·오희영 등 6~7명을 푸양에 파견했다. 김학규 장군은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서로군정서 간부와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있으면서 혁명 동지들의 자녀 교육에도 힘썼던 분이다. 그는 푸양으로 파견될 때 징모처 주임과 명목뿐인 제3지대장을 겸임하고 있다가 초모공작의 진행으로 대원이 늘어나자 실제로 광복군 제3지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처음에 함께 출발한 대원들은 모두 제3지대의 간부직을 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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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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