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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패망의 길로 접어든 1945년 임시정부는 미군과 손잡고 한반도 상륙작전을 펴기로 하고 학도병 출신 광복군들을 전략사무국(OSS)에 보내 정예요원으로 훈련시켰다. 사진은 오에스에스 훈련을 마친 광복군 제3지대 대원들로, 맨 가운데 미군 왼쪽이 백파 김학규 지대장(광복군 참장), 오른쪽은 미숙 이복원 선생(광복군 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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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73
1944년 미국 전략사무국(OSS)은 미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한인 지하공작원들을 훈련시켜 미리 잠입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 미군은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편입된 ‘학도병’ 출신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자력으로는 진행하기 어려운 국내 침투 공작을 미군과 함께 전개하는 가능성에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지대 본부가 있는 푸양 서쪽 린촨(임천)현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린촨분교가 있었다. 전쟁의 발발로 군관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중앙군교는 여러 곳에 분교를 새로 설립했다. 제3지대에서는 새로 참여한 대원들을 이곳으로 보내 훈련을 받게 했다. 학병 출신의 탈영자들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44년 11월30일 제1기 훈련생의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생 중 일부는 임정이 있는 충칭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바로 그날 신송식 대장 인솔하에 일행 53명이 임정을 향해 출발했다. 안후이성 서북의 린촨과 충칭시 사이의 직선거리가 약 1000㎞였으므로, 실제 거리는 아마 2~3배는 됐을 것 같다. 마지막 일부 구간은 배편을 이용했으나 대부분은 도보 행진이었다. 이들은 안후이를 떠난 지 2개월 만에 충칭의 임정 청사에 도착했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청사에 도착한 일행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임정과 충칭의 한인들은 이들을 그야말로 열렬히 환영했다. 충칭에서 약 20일간 머문 뒤 2월20일께 이들은 한인촌과 앞서 언급한 스웨덴 교회에서 기부한 ‘기독교청년회관’이 있는 투차오로 옮겨왔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방 3칸을 내주었다. 그 가족들도 해방 뒤 우리가 투차오를 떠날 때 함께 귀국 행렬에 올랐다. 청년대원 40여명은 기독교청년회관에 입주했다. 중국군 상교(대령)로 있다가 새로 광복군에 편입한 최용덕 장군(참장)이 대장을 맡았으며, 투차오에 있는 동안 이들은 ‘투차오(토교)대’라고 불렀다. 이들은 투차오에서 약 10주간 머물렀으며, 4월29일 충칭 시내로 다시 떠났다. 이들이 투차오에 있는 동안 임정 가족들은 이들을 위해 모든 편리를 도모했다. 어머니는 이들이 도착하기 며칠 전에 먼저 그곳에 와서 이들의 거소와 새로 입주할 가족들이 자리잡는 일 등을 돌보았다. 나도 이들이 머무는 동안 자주 그곳에서 보냈다. 이들과 만나 국내 얘기, 일본 유학 시절 얘기, 그리고 일본 군대 생활과 탈출할 때의 얘기 등을 듣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들과 함께 화탄치(화탄계) 건너 칭화중학교의 농구장에 가서 시합도 하고 수영도 즐겼다. 충칭은 아열대 기후여서 3월부터 10월까지 수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년회관 안에 탁구대가 있어 거의 매일 그들과 함께 탁구도 쳤다. 몇 해 전까지 광복회장을 지낸 윤경빈, 현재 광복회 서울지부장을 맡고 있는 석근영 등이 특히 탁구를 잘 쳤던 것이 기억난다. 청년회관에는 교당이 있어 토교대원들이 오기 전에도 매주 예배를 봤다. 한독당 감찰위원장으로도 있었던 혜춘 이상만 목사가 몇 안 되는 신도를 상대로 교회를 운영해 왔다. 그런데 대원 중에 기독교 신자가 몇 사람 있었으며, 신학교를 나온 장준하가 있어 교회 일을 거들었다. 그는 주일학교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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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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