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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4.29 22:42 수정 : 2010.04.29 22:42

귀국한 이듬해인 1947년 필자가 보성중학교 5학년 때 어머니(정정화) 아버지(김의한)와 찍은 가족사진은 50년 부친의 납북으로 마지막 모습이 됐다.(왼쪽) 2006년 10월1일 필자는 가족들과 함께 평양 인근 용성지구에 조성된 재북인사 묘지를 찾아 64년 10월9일 병사했다고 기록된 부친 묘소에 참배했다. 왼쪽부터 둘째딸 선현, 부인 김숙정, 필자, 아들 준현, 막내딸 미현. 맏딸 진현은 한해 앞서 방북해 참배했다.(오른쪽)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83-마지막회

1946년 5월 중순 귀국한 뒤 다음달 나는 6년제 보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으며, 49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귀국 뒤 재건된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을 다시 맡게 됐으며, 백범·우천·일파 등 중국에서의 옛 동지들과 같은 노선에서 활동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45년 11월 말 귀국한 뒤 12월 초 백범 선생 등 여러 분이 함께 입주한 죽첨동(현 교남동)의 경교장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계속 단결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이 단결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견해차로 깨지고, 임정의 활동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우리의 국내생활은 무척 어려웠다. 귀국 이후 1년 가까이 혜화동의 작은숙부(각한) 집에서 함께 지냈다. 숙부도 여러 식구에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아버지는 더는 부담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해 근처의 일식 가옥에 세를 내어 옮겼다. 그러나 그도 어려워 결국 1년 사이에 세 번이나 이사하다가 돈암동에 있는 큰고모(영원)네 집으로 들어가 1년 정도 고모 모녀와 우리 가족, 할머니가 방 셋뿐인 좁은 집에서 함께 살았다.

우리는 일본인에게 빼앗긴 종로 청운동의 옛집 ‘백운장’을 가보았다. 일본인들이 그 자리에 새로 일식 가옥을 지어 요정으로 사용했으나, 할아버지가 살던 옛집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당장 집을 찾지는 못하더라도 연고권을 내세워 군정청 관재국으로부터 임대차 허가를 받아냈다. 그러나 먼저 입주한 사람들을 내보내는 명도가 되지 않은 상태로 50년 6·25가 터져 아버지가 북행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집에서 함께 사업을 하기로 했던 기업가 김성술씨가 임대료를 대납한 적도 있었다. 그는 우리 가족이 너무 협소한 곳에서 지내는 것을 보고 자기 집의 방을 하나 내주었다. 우리는 귀국 이후 6번째로 종로구 도렴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전쟁을 겪었다.

50년 9·28 수복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열흘 남짓 전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섰다. 몇몇 청년들이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더니 조소앙 선생 댁에서 회의가 있는데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을 때였으므로 북으로 연행되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다. 그 후 조시원 선생으로부터 삼선교에 있는 소앙 선생 댁에 모여 그날 저녁 버스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상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아버지는 이른바 ‘모시기 작전’에 의해서 북행하게 된 것이다.

나도 8월 초 의용군으로 강원도 이천까지 갔다가 탈주했으나, 몇 시간 만에 인접한 황해도 지역에서 잡히고 말았다. 다시, 북상하는 다른 의용군 부대에 편입됐는데, 이번에는 중병에 걸린 것을 가장하여 결국 귀향 허가를 받고 9월20일쯤 집에 돌아왔다. 돌아온 나를 보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잃은 것도 잊을 정도로 기뻐하셨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6·25 당시 나는 서울법대 2학년에 막 진급했으나 이후 재등록을 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는 미군의 통역으로 있으면서 ‘후방요원증’을 받아 병역을 면제받고 지냈다. 휴전 뒤인 54년 6월 <조선일보>에 공채로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61년엔 <민족일보> 창간에 참여했다. 하지만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은 군사정권에 의해 그해 12월21일 교수형으로 30살의 젊은 일생을 마감했다. 6년 전부터 조 사장의 동생 조용준 등과 ‘민족일보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억울하게 처형당하고 옥살이한 여러 사람의 신원운동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2005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를 결성해 창립 때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듬해 기념사업회 관계자 50여명과 함께 북쪽의 초청과 남쪽의 허가를 받아 평양 근교 용성지구의 애국열사릉과 재북자묘에 있는 임정 어른들의 묘소를 참배했다. 우리 가족은 64년 평양에서 작고한 아버지의 묘소에 40여년 만에 배례를 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91년 별세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이제 팔순이 넘고 보니, 한 일은 별로 없어도 남겨야 할 얘기는 많으나 아쉽게 붓을 놓는다. <끝>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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