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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5.31 18:44 수정 : 2010.06.01 00:15

필자의 선친 문법문(왼쪽)·모친 장순례(오른쪽)씨 영정. 성당이 없던 마을에서 공소회장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엄격한 가톨릭교도의 자세로, 어머니는 천사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신앙심을 키워줬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1





내 부모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아버지(문법문)는 원래 경상도 하동 사람인데 일곱살 때 전북 김제 수류로 이사를 왔고, 어머니(장순례)는 충청도에서 살다 가톨릭교도에 대한 박해를 피해 수류로 옮겨와 정착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수류에는 천주교 신자 400여가구가 모여 살던 교우촌이 있었고, 그곳 수류성당은 원래 1895년 9월까지 모악산 깊은 골짜기 배재마을에 있다가 평야지대로 옮겨온 역사 깊은 곳이었다. 수류성당에 다니며 인연을 맺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1935년 전주 전동성당에서 혼인미사를 올린 뒤 익산(옛 이리)을 거쳐 전주에서 40여년 해로했다.

나는 1940년 8월20일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에서 4남3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황등리는 익산과 함열 사이, 호남선 기찻길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우리는 철길을 마주 보는 곳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 집이 바로 황등리 공소였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이들도 많았다. 거제도수용소 포로 출신인 사람도 두 분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늘 당신들보다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길을 가다가도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 집으로 데려와 밥을 먹여 보냈고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어릴 적 기억에서 가장 생생한 것은 부모님이 상갓집에서 시신을 거두는 일을 도맡아 한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마을에 초상이 나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서 염을 했다. 썩을 대로 썩은 주검을 고무장갑이나 마스크도 없이 거두니 집에 돌아오면 몸에서는 물론이고 온 집안에서 며칠씩 썩은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두 분은 냄새를 없애려고 호박잎에 손을 비비고 여러 번 물로 닦으셨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린 우리들은 그 냄새가 무척 싫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는 왜 그런 천한 일을 도맡아 하세요?”라고 물으면 두 분은 역정 한 번 내시지 않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는 거야. 돌아가신 분을 정성스럽게 하느님께 보내드리는 일은 귀한 일이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제나 가장 슬프고 아픈 사람들을 섬겼던 부모님의 삶이 사제로서의 내 삶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고된 밭일을 하실 때도 틈틈이 성서를 읽고 기도를 하시던 아버지는 복음대로 사신 분이었다.

아버지는 한때 ‘센베이’라는 일본식 과자 굽는 공장을 운영했다. 공장은 영세하기 짝이 없었지만 돈은 꽤 벌었던 것 같다. 또 토탄(논이나 밭에서 캐낸 물먹은 나뭇잎이나 나무토막을 말린 땔감)을 캐서 팔거나 잡화점도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주로 밭농사를 지었다. 고추·참외·오이 따위를 거둬서 수레에 싣고 자전거로 끌어 익산 약관에 내다 팔았다. 농산물이나 채소 값이 워낙 들쑥날쑥하다 보니 때로는 받는 돈이 형편없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 일곱 남매를 비롯해 친가의 큰아버지와 고모님댁, 거기다 외가의 외조부모님과 작은외삼촌까지 거두며 살림을 꾸릴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문정현 신부
아버지는 장남을 무척 아끼셨다. 형(문대현)은 나보다 3살 위다. 아버지는 월사금을 줘도 형님 먼저, 옷을 입혀도 형님 먼저였다. 형은 펜을 굴릴 사람이지 일할 사람은 아니라고 해서 심부름도 나만 시켰다. 그러다 보니 물을 긷고 지게질을 하고 밭일 돕기도 형보다 내가 많이 했다. 고등학교 때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고추를 팔러 장에 나간 적이 많다. 하루는 장에서는 값이 너무 형편없어서 수레를 끌고 여관 음식점 골목골목 돌아다니면서 직접 고추를 팔았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다 팔지 못했다. 속상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들 걱정을 하던 부모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버지는 내가 판 고추 값을 드리자 코가 벌렁벌렁하실 정도로 좋아하셨다. 늘 형만 편애하던 아버지께 칭찬을 받으니 무척 좋았다. 나는 아버지가 첫째와 둘째를 차별하는 데 불만이 많아서 아버지께 반항도 꽤 많이 했다. 형한테만 월사금을 줄 때면 돈을 달라고 떼쓰고 야단을 치면 도망을 쳤다가 다시 가서 또 달라고 하며 기어코 받아내기도 했다.

구술 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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