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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운동을 하느라 서울에 올라와 머물렀던 명동성당 근처의 한 수도단체 기숙사에서 김지하 시인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함께 했다. 왼쪽부터 서 있는 이가 지정환 신부, 그 앞으로 김 시인 어머니, 신현봉 신부, 최기식 신부, 필자.(왼쪽 사진) 74년 전국성년대회 강론에서 ‘반유신’을 선언한 김재덕 전주교구장.(오른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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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길 위의 신부 11
전주교구가 유신정권에 확실히 반대한다는 것을 교회 안팎에 선언한 계기는 1974년 10월9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에서 열린 전국성년대회였다. ‘한국 순교자 현양을 위한 거룩한 해’를 기념하는 이 대회는 주교회의가 주최해 전국에서 사제와 신도 수백명이 운집한 큰 행사였다. 이날 강론을 맡은 전주교구장 김재덕(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첫머리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하신 성년선포 특별교서를 소개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에 대해 말했다. 김 주교는 “교회는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도처에서 전파하고 특히 궁핍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끔 정의와 일치를 위한 일을 증진시키는 데 선도의 구실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유신헌법을 즉각 철회하고 군사재판을 중지하며 정치 수감자들을 전원 석방하고 함부로 비상대권을 남용하지 말라”고 선언했다. 또 권력과 돈을 좇는 교회를 향해 “우리 사제들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하는데, 돈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겠느냐”고 일갈했다. 이날 김 주교는 베트남의 티우 정권,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예를 들며 한국 현실을 걱정했다. 특히 5·16 군사쿠데타, 그리고 72년 단행된 이른바 10월유신의 비민주성을 비판했다. 이 강론은 보수 성향의 주교가 많았던 천주교계에 큰 충격이었다. 김 주교는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와 서울 동성상업학교 16회 동기동창으로 사회의식이 뚜렷한 분이었다. 그날 대회에 앞서 전주교구에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천주교계에 반유신의 기운이 번져가자 중앙정보부는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하나로 도지사를 비롯한 전라북도 기관장과 전주교구 주교와 신부들을 불러 테니스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김 주교를 찾아가 테니스대회를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김 주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화가 난 나는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 나왔다. “제가 무슨 일을 벌여도 벌일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십시오.” 테니스대회는 예정대로 열렸고, 사제들은 참여하지 않은 쪽과 참여한 쪽으로 갈렸다. 교구 내 성당 주임신부들을 그 지역 군수의 차량으로 모셔 오기도 했다. 나는 전주중앙시장에 가서 천을 떠서 잘 쓰지도 못하는 글씨로 “지학순 주교 석방하라”는 현수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벨기에 출신으로 임실치즈를 개발하고 있던 임실성당의 지정환 신부와 함께 테니스대회가 열리는 당시 삼양사전주공장 안의 코트로 갔다. 김 주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지 신부와 함께 “지학순 주교를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테니스대회는 중단이 되고 도지사, 경찰청장을 비롯한 각 기관장들과 대회에 참석했던 사제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들은 코트를 빠져나가면서 나를 외면하거나 미움과 저주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전주교구청으로 갔다. 마침 주교님 방에는 테니스대회에 참여했던 신부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주교님을 만나고 나오며 나를 또 노려보았다. 모멸감을 참으며 주교 방으로 들어갔다. 김 주교는 몹시 화가 나 나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문 신부, 너 사람 좀 되라!” 나도 맞받아치고는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사람 같지 않은 신부를 데리고 있는 주교님도 마찬가집니다.” 그날 온종일 어찌나 신경을 쓰고 고함을 쳤는지 현기증으로 쓰러질 지경이 된 나는 결국 전주성모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병문안을 온 지 신부에게 김 주교와 논쟁한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가 대뜸 이랬다. “그래, 너는 머리만 사람이고 몸은 원숭이구나.” 지 신부는 어디서 원숭이 사진을 가져다가 머리를 도려내고 대신 사람 얼굴을 붙여서 만든 액자를 내 침대 머리맡에 놓고는 놀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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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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