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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인민군에 끌려가 전주형무소에서 두 달 동안 고초를 겪은 전주교구의 사제들이 풀려난 당시 모습. 뒷줄 오른쪽부터 김영구 신부, 김현배 주교, 이약슬 신부, 앞줄 오른쪽부터 김종택·김재덕 신부, 이대권 부제다. 전주교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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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길 위의 신부 24
1979년 12월8일 나는 드디어 석방되었다. 그리고 80년 1월16일 전주 중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 전주 중앙성당은 주교좌성당이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나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은 김재덕 주교가 대외적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는 표현의 하나였다. 김 주교는 76년에도 5월 사제서품을 받는 문규현 신부를 8월에 고산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낸 적이 있다. 나는 그 일을 김 주교가 규현 신부로 하여금 사회사목을 편히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81년 4월 평소 알고 지낸던 안기부 요원에게 연락이 왔다. 당시 로마에 출장중인 김 주교가 건강 문제로 스스로 사임을 했다는 것이었다. 73년 5대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지 8년 만인데 사임을 하신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김 주교는 한국전쟁 때 전주교구 3대 교구장이었던 김현배 신부님을 비롯한 4명의 신부와 함께 인민군에 끌려가 두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지만 그 대신 건강을 잃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지나면 늘 교구청 침실에 올라가 두 시간쯤 쉬다 내려왔다. 철없던 젊은 시절에는 주교님이 그 긴박한 시국에도 쉬는 시간을 챙기는 것에 화가 나 불평도 했다. 그런데 막상 주교님이 건강 문제로 사임을 하신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안기부 요원의 전화를 받자마자 당시 김환철 총대리 신부를 찾아갔더니 사실이었다. 김 주교의 사임 배경에 대해서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본인은 결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유신 말기 한차례 구속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던 김 주교의 강한 반독재 투쟁으로 교황청에서조차 그를 못마땅해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결국 그해 4월10일 김 주교가 은퇴한 뒤, 83년 6월24일 박정일 주교가 임명될 때까지 전주교구 교구장 자리는 공석이었다. 김 주교는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을 강조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앞장선 분이었다. 그는 교구 사제들이 수없이 연행·투옥되고 피습까지 당하는 상황에서도 결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다. 교구 내에도 민주화운동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늘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어 흔들리지 않았다. 교구장으로서 쉽게 한쪽 편을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중심을 지켰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사제들을 아꼈다. 김 주교는 은퇴한 뒤에는 교구 행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대쪽 같은 분이었다. 병석에 누우신 뒤로 문병을 자주 가지 못했다. 88년 운명하시기 이틀 전 뵈러 갔더니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문 신부, 수고 많았어. 전교 많이 했어. 앞으로도 꼭 그렇게 살아.” 그 말이 유언이 되었다. 그날 주교의 격려는 내 삶에 큰 힘이 되었다. 김 주교는 독재정권과 싸우는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때로는 채찍이었다. 그러나 내가 젊었을 때는 주교님이 불의에 맞서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데도 주춤거린다고 느꼈다. 주교로서 여러 가지를 고려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교님께 ‘아닌 것은 아니오, 예 할 것은 예 하라’고 강요했다. 주교님은 그럴 때마다 “세상에 자네만 있는 것이 아니야”라고 꾸짖었다. 그렇지만 그분의 뜻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그만큼 끝까지 지조를 지킨 분이 드물다. 훌륭한 분이었다. 79년 박종상 신부 구타 사건이 터졌을 때 교회의 유일한 매체였던 <가톨릭신문>에서 전주교구 전체가 단식하는 기사를 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김 주교는 무척 노하여 교구 사제단 결의로 교구 전체가 그 신문을 보지 않도록 했다. 당시 대구교구에서 만들던 가톨릭신문은 ‘유신’을 찬성하고 있었다. 전주교구가 그 신문을 재구독한 것은 박정일 주교가 부임하고도 한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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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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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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