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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6일 광주교구 김성용 신부(맨 앞)를 비롯한 홍남순·이기홍·윤영규씨 등 수습대책위원 17명이 계엄군의 무력진압을 막고자 금남로에 일렬횡대로 서서 ‘죽음의 행진’을 벌이고 있다. 김 신부는 최종협상에 실패하자 그날 밤 전주로 빠져나와 필자 등에게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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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길 위의 신부 25
1979년 12·12사태 이후 시국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전주 중앙성당으로 부임받자마자 전주 보안대에서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전주의 보병 제35사단 사단장은 교우라는 핑계로 성당에 오더니 교구청까지 들락날락거렸다. 80년 3·1절에도 밀착감시는 이어졌다. 그해 봄 들어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곧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퍼졌다. 그러자 공화당 쪽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까지 찾아와서 사제관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세상이 바뀔 것 같으니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또 동교동 쪽에서도 자주 찾아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일에도 초대를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나는 정치인과는 그 어느 쪽이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때는 이쪽저쪽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하니까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나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12·12사태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실질적인 권한을 잡았다. 그래서 나는 미사 때마다 정치에 군인들이 나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미사 중에 정보 계통 사람들이 눈에 띄면 미사를 중단하고 내쫓아버렸다. 내가 신군부에게도 그렇게 하자 신자들 중에는 겁먹는 사람도 있었고,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80년 5월 마침내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5·18 이후 정보부·경찰·보안대의 감시는 더 심해졌지만 섣불리 예비검속을 하지는 않았다. 전주교구의 특성상 사제들 전체가 움직여 오히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을 알았던 것이다. 5·18 직후 김현장이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이란 문건을 만들어서 나를 찾아왔다. 문건을 본 나는 너무 놀라 그것을 들고 교구청으로 가 김재덕 주교와 김봉희 사목국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신부들에게 보여주었다. 전주교구는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회를 소집하고 광주항쟁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김 주교와 김 사목국장을 대표로 광주교구청에 파견해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고 위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5월21일 광주로 떠났던 대표단은 장성에서 되돌아왔다. 그때 이미 항쟁은 광주를 넘어 전남 전역으로 퍼져가던 중이었다. 전주교구 사제단은 논의 끝에 전국으로 이 사실을 알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마침 교구청에 최신형 고속윤전기가 있어서 ‘전두환 광주 살육작전’을 1만장 복사해 부산·대구·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우리 성당에서도 미사 전후로 유인물을 주보에 넣어서 나눠주었다. 하루는 나도 모르게 성당 고등학생 2명이 유인물을 나눠주는 데 합류했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그 아이들은 곧 풀려나왔지만 놀란 두 학생의 부모는 성당으로 달려와 “신부님이 우리 아이를 책임질 거냐?”고 노발대발하기도 했다. 고산성당 문규현 신부와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는 유닛 앰프를 구입해 종탑에 걸어놓고 광주학살을 폭로하고 그를 규탄하는 강론을 하면서 성당 밖 주민들도 들을 수 있도록 방송했다. 여산성당에 속한 공소 가운데 광주학살에 직접 참여한 제7공수단이 있는 금마공소가 있었는데 박 신부는 금마공소의 미사 때 “국민을 죽이는 군대는 민족의 군대가 아니다. 공수대원은 민족의 배신자다. 공수대원들에게는 집을 세주거나 쌀을 팔지 말라”고 주장해 지역 일대가 술렁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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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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