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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6일 천주교 아시아 주교회의 인간개발위원회(인성회) 사무총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필자의 동생 문규현(왼쪽) 신부가 평양 장충성당에서 통일기원 미사를 드리고 난 뒤 신자들과 함께 춤을 추며 친교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함께 방북한 미국 메리놀수도회 베네로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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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길 위의 신부 35
1987년 초 동생 문규현 신부는 가톨릭농민회 전국연합회 지도신부로 추대를 받았다. 가톨릭농민회 회장들의 추천을 거쳐 지도신부들이 만장일치로 추대를 한 까닭에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규현 신부는 춘계 주교총회에서 추인을 받을 때까지 남은 5개월 동안 ‘정의와 믿음 워크숍’에 참가하고자 아일랜드로 떠났다. 그런데 주교총회에서 그의 지도신부 추대 건의에 대한 인준이 부결되더니, 돌연 유학 발령이 났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 뉴욕주 오시닝에 있는 메리놀 외방선교회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1년 남짓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그는 88년 5월 잠시 귀국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조성만 열사가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에서 할복투신을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규현 신부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조성만의 유서를 읽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 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라고 시작되는 유서에는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과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묻어났다. 특히 유서 말미에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 고백에 감명을 받았다.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조성만이야말로 진정한 사제고, 이 시대의 예수라고 느꼈다.” 그는 그때 한 청년을 집어삼키고, 7천만 온 겨레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근본 원인이 ‘남북 분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송회·남민전·인혁당…, 하나같이 빨갱이로 매도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약자가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우면 무조건 빨갱이가 되었다. 그래서 농민도 노동자도 다 빨갱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조성만이 죽음으로 증언한 ‘통일’을 논문 주제로 정하고 제목도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신학적 소고’로 정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내내 조 열사의 영정을 방에 걸어 놓고 논문을 썼다. 그 무렵 필리핀에 있는 아시아 주교회의 산하 인간개발위원회(인성회) 사무총장으로 있던 데스몬드 신부가 익산 창인동성당으로 찾아와 내게 아시아 주교회의 사무총장 자리를 제의했다. 그래서 함께 박정일 전주교구 주교를 만나 허락을 요청했다. 박 주교는 인성회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나는 작은 자매의 집 때문에 거절을 하면서 대신 규현 신부를 추천했다. 박 주교도 흔쾌히 허락을 했다. 데스몬드 신부 역시 동의해 인성회 총재인 요코하마의 하마오 주교에게 그를 추천했다. 하마오 주교는 이를 받아들여 89년 여름 그가 대학원 공부를 마칠 때까지 사무총장 자리를 비워두기로 했다. 석사 논문을 끝낸 규현 신부는 89년 6월6일 유엔 대사와 직접 교섭해 인성회 사무총장 자격으로 북한 외무성의 초청을 받아 첫번째 평양 방문을 했다. 당시 그는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어서 북한에 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해왔던 대로 평양 장충동성당에서 이날 오후 2시에 통일기원 미사를 드렸고 같은 시각 남쪽 임진각에서도 미사를 올렸다. 그날부터 그는 장충성당 명예 본당신부가 되었다. 이는 개인적인 결단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렇게 그는 남북 동시 미사를 봉헌한 첫 사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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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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