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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1995년부터 10년 기한으로 ‘한국 통사’ 집필을 하도록 도와준 수많은 후원자 가운데 특히 건강 관리를 챙겨준 내과의사 선왕주 원장(왼쪽)과 서지영 약사(오른쪽)는 잊지 못할 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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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86
1995년 여름부터 ‘한국 통사’ 집필을 하고자 머물던 장수 연화마을 시절, 불편한 점도 얘기하자면 물론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깊은 산골마을이라서 그랬는지 밤이면 전등이 곧잘 나갔다. 나는 하루 내내 쓴 원고를 작업 마지막에 저장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전기가 나가 컴퓨터가 꺼지면 ‘컴맹’인 나로서는 원고를 다시 복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고스란히 하루치 작업량을 날려보내도 속수무책이었다. 또 어쩌다 책상 밑의 전원을 내 발로 건드려 컴퓨터가 꺼지기라도 하면 난감했다. 주로 새벽에 글을 쓰는 습관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전화하기에도 마땅치 않았고, 그나마 전화로 조작 지시를 받는다 해도 알아듣질 못하니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중엔 마침 언저리에 사는 한 애독자가 컴퓨터를 다룰 줄 안다고 해서 자주 불러와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한여름이면 내 방 바로 옆에 서 있던 미루나무에서 밤새 울어대는 매미 소리도 글쓰기 작업에 적잖은 방해를 했다. 동네 골목마다 전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서 낮인 줄 착각하고 울어대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환경 탓에 생태계가 변한 것이니 매미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한번은 참다 참다 돌을 들어 높은 미루나무 위쪽으로 던져도 봤지만 매미는 비웃기라도 하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울어댔다. 또 방 바로 앞에 개미떼가 굴을 파고는 끊임없이 마루와 방 안으로 몰려들어 내 다리를 물었는데, 빗자루로 쓸어내도 소용이 없었다. 왕파리와 왕모기도 등장해 모기장까지 뚫고 들어와서 물어댔다. 내게는 도시살이에서는 잘 몰랐던 새로운 공해 주범들이었다. 겨울이 닥치자 친구 황승우가 와서 전기 패널을 깔아주었다. 덕분에 방바닥은 뜨뜻했으나 외풍이 너무 심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컴퓨터를 두들겨야 했다. 아랫목 장판은 새까맣게 탔지만 유리창에는 성에가 쫙 끼었다. 소문대로, 눈이 몇십센티씩 쌓여서 이장 댁으로 밥 먹으러 건너갈 수도 없는 날이 자주 있었다. 그러니 1주일에 한번씩 하던 장계시장 나들이도 중지할 수밖에 없어, 감옥살이가 따로 없었다. 나는 이때 다산 정약용 선생과 아버지(야산 이달)를 생각했다. 다산은 강진 등 남도 유배지의 산속 움막에서 20여년을 견디면서 <목민심서> 등 많은 저술을 냈다. 아버지 역시 산속 절에서 불을 밝힐 기름도 없어 어두운 가운데 죽을 먹어가면서 <주역>을 암송하고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나는 돈을 받고 글을 쓰며 먹을거리도 넉넉해 그분들의 고난과 견줄 정도가 아니었으니 이게 무슨 고생이겠는가. 농한기인 겨울에는 마을회관에서 술자리가 잦았다. 물론 주민들은 나를 빼놓지 않고 불렀고 종종 어울려 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도 나 나름의 불문율이 하나 있었는데 화투놀이에는 절대 끼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나는 바둑과 장기를 사다 놓아두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화투판 벌이기를 더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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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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