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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구리남양주시민모임이 주최한 ‘고구려 관련’ 초청강연회에서 서길수 교수(서경대·왼쪽)와 함께 연사로 나선 필자(오른쪽). 아치울 주민으로서 이웃들과 시작한 지역 역사 찾기 노력은 때마침 중국의 ‘동북공정’ 대응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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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97
내가 1982년부터 26년간 살았던 구리 아치울 마을은 아차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아차산에 오르면 한강과 그 건너 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이 한눈에 보였다. 90년대 들어 아차산 일대에서 고구려 보루성이 발견되었다. 이 일대 답사를 한 김민수 선생이 산불이 난 자리에서 석축을 발견했고, 이에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에서 발굴을 서둘렀다. 94년 지표조사를 통해 15개의 보루를 찾아냈다. 서울대 박물관팀(관장 임효재)에서 조사를 한 결과, 군영터·우물터 등 유구와 무기류·공구류·마구류·그릇류 등 유물 1500여점이 발굴되었다. 이를 전문가들이 확인해보니 거의 대부분 고구려 유물로 밝혀졌다. 어림잡아 1500년 넘게 땅속에 묻혀 있다가 햇빛을 본 셈이다. 주말이나 공휴일마다 능선길 등산로를 따라 산을 한바퀴 돌아 내려오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무심히 밟고 지나는 바로 그 발밑에서 말이다. 특히 한강변에 있는 시루봉 보루는 전방 감시 초소로 추정되는데 그곳에서 식수 저장 터가 발굴되었다. 그 터는 지하 5m 정도의 깊이로 진흙을 벽과 바닥에 진하게 발라 물이 새지 않게 조성했다. 바로 아치울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을 길어다가 저장한 것이다. 고구려는 5세기에 들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영토를 넓히면서 한강을 탐냈다. 이곳은 농업 중심지여서 농업 생산력을 높이려는 의지가 있었다. 이 남진정책은 자연스레 한강을 다스리고 있는 백제와 맞부딪쳤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전쟁을 벌여야 했다. 광개토대왕은 한강 입구인 관미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북쪽을 석권했다. 백제의 아신왕은 반격전을 펼쳤으나 거듭 실패했다. 광개토대왕은 중원(충주)까지 영토를 넓혀놓고 죽었다. 뒤이어 475년 그의 아들 장수왕은 3만 군사를 이끌고 남쪽 정벌에 나섰는데 한강을 넘어와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지금의 송파구 풍납토성으로 추정)을 공격했다. 이때 개로왕을 잡아와 아차산 아래에서 죽였다. 이때부터 아차산 일대는 고구려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그런 뒤 한강을 두고 삼국이 공방전을 펼친 끝에 6세기 들어 신라가 석권했다. 이럴 무렵 평민 출신 장수 온달이 한강 일대의 고토 회복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아차산성에서 군사를 점검하고 있었다. 온달은 본격적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충북 단양에 온달산성이라는 전설을 지닌 산성이 있으나 기록으로 보아 사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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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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