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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18 18:36 수정 : 2011.05.29 15:06

광주여고 2학년 때인 1953년 여름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부원들과 함께한 필자(가운데). 중학교 때 농구를 시작한 필자는 전국체전 전라남도 대표로 출전하는 등 고3 때까지 선수로 활약했다.

[길을 찾아서]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③

중학교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다. 키는 껀정하니 큰데 코스모스처럼 빼빼하고 몸이 약하니까 아버지가 친구인 농구부 지도선생님에게 부탁한 것이다. 아침이면 도시락을 두 개씩 싸들고 등교해 방과후에 남아 연습을 했다. 처음엔 코피도 많이 흘렸지만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초등학교 때 피구(터치볼) 같은 것을 할 때는 피해만 다니고 소극적이었는데 농구는 괜찮았다. 몸이 피곤해도 이겨냈고, 그러자 학교 대표로 시합에 나갈 만큼 실력이 늘었다.

이듬해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광주시내도 낮에는 폭격이 심해서 시외로 피난 갔다 밤이 되면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시골 할아버지댁으로 걸어서 피난을 갔는데, 내 키가 너무 크니까 어머니는 남자 옷을 입혀 눈에 띄지 않게 해주셨다. 가장 공포스러웠던 기억은 미군 폭격기 B29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마구 쏘아대면서 뿜어내는 엄청난 괴음이었다. 어느날 영어 담당 김우성 선생님이 그 한여름에 옛날 할머니들이 쓰고 다니던 솜 넣은 조바위를 둘러쓴 채 중심가인 충장로 한복판을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폭격이 심한 시절이라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전쟁 때 곳곳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빨치산으로 입산하기도 했다. 무안에서 지역 유지였던 큰아버지도 경찰서를 만드는 데 앞장을 섰다는 이유로 악감정을 가진 주민들에게 납치당해 죽임을 당하셨다. 전쟁 당시엔 인민군이 한 짓이라고들 선전을 했지만, 훗날 이웃과 친구들의 증언을 확인해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그 시절 민간인 희생 사례 중에는 동네 사람들끼리 감정대립으로 죽이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큰아버지의 횡사 이후 할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은 성당을 다니기 시작했다. 중1 때 담임으로 국어를 가르친 박미자 선생님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도 들렸다. 늘 통일을 생각하고 미래를 걱정했던 분이기에 뭔가 깊은 고뇌를 했을 것이란 생각이 어렴풋이나마 들었다.

전쟁 이후 다시 학교에 갔는데 4교시가 끝나고 나면 유난히 얼굴이 빨개진 친구들이 많았다. 밥거리가 없어 아침에 술지게미를 먹고 왔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가끔 그랬으니까.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몹시 아프다. 참혹한 전쟁 모습과 그 상처들이.

전쟁통이었던 51년, 학제가 중학교 6년제에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인 6-3-3-4제로 바뀌었다. 유일한 공립이었던 광주여고로 진학했다. 전남여중을 다녔던 친구들도 다시 만나게 됐다. 고등학교에서도 여전히 농구선수로 뛰었는데, 우리 학교가 전라남도 여고부 대표팀으로 뽑혀서 전국체전에 참가하게 됐다.

전국체전은 53년 9·28 서울수복 직후인 10월에 열렸는데, 전남 대표로 출전하는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광주역 광장에 모여 함께 출범식을 했다. 서울까지 기차로 갔는데 자리가 모자라서 내내 서서 가야 했다. 명색이 도 대표팀인데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저 신이 나서 마냥 떠들며 피곤한 줄 몰랐다.

서울역에서 우리 팀은 배정받은 동대문 바로 옆 태평여관에서 묵었다. 운동 종목별로 지역간 자매결연이 돼 있었는데 서울의 어느 중학교 남학생들이 우리 농구부를 환영하기 위해 여관에 와 있었다. 저녁을 먹고 여관방에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는데 한 학생이 “저기… 광주에도 자동차가 있어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건방진 표현은 아니었는데도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서울은 서울일 뿐이고, 우리도 나름대로 여유있게 살았는데 ‘아주 완전 시골뜨기로 아네. 서울 촌놈!’ 그만큼 지역간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던 시절의 웃지 못할 삽화인 셈이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이튿날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전 입장식을 할 때의 기쁨과 감동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축복이라 할까, 남부러울 것 없는 기쁨을 맛봤다 할까, 그 자체로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악대의 웅장한 연주와 오색으로 장식한 풍선들이 한껏 분위기를 높였고, 더군다나 수복 직후 첫 체전이라 정부에서도 무척 신경을 써서 축제로 만들었다. 여고부는 광화문 쪽 경기여고 농구코트에서 시합을 했는데, 우리 대표팀은 원주여고, 경기여고와 시합을 벌여 연달아 이겼다. 하지만 세번째 시합에서 아쉽게도 지고 말았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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