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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1일부터 광주시민들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을 몰아내고 ‘해방 공동체’를 이뤘다. 시민군 지휘본부가 있던 전남도청 앞에서는 날마다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누구나 자유롭게 분수대 단상에 올라 ‘자유와 민주’를 노래했다. 필자도 당시 현장에서 함께했다. <오월광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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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24
1980년 5월19일 밤부터 광주시내에는 전기가 끊겼다. 공수부대의 무차별한 가택수색과 연행을 피해 목포 사촌이모네로 가겠다는 두 아들을 설득하는 동안 아파트 밖에서 주민들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두 손을 입에 모아 손마이크를 만들어 외치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다 나오세요. 우리가 아파트를 지킵시다. 각목이든 뭐든 집에 있는 대로 들고 정문 앞으로 나오세요. 젊은이들 빨리 나오세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리치며 아파트단지를 돌고 있었다. “저 봐라. 여기를 사수하자는 것 아니냐. 그런데 너희들이 빠져나가면 되겠느냐. 아직 여기 빠져나간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러니까 당하더라도 같이 당하자. 여기 있어.” 그 소리를 듣고 아들들은 결국 주저앉기로 했다. 하지만 ‘저 가방들은 방으로 가져다 두라’는 내 말에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아직은 가야 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눈치들이었다. 밖은 점점 더 캄캄해지고 웅성거림과 함께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을 지켜야 됩니다’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제야 두 아들은 가방을 안에 들여놓고 눌러앉았다. 그 저녁 어둠 속에서 나는 두 아들을 앉혀놓고 박정희 군부독재가 이어져온 과정과 10·26 쿠데타 등 우리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 우리 세 모자와 아파트 주민들은 그 밤을 무사히 넘겼다. 20일부터는 전화도 끊겼지만 사람들 입을 통해 광주 시내와 외곽 곳곳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는 처참한 소식이 계속 전해졌다. ‘화정동 어디 고갯길에서는 시민군을 잡으려다 군인들끼리 총 쏴서 죽었다’라든가 ‘화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는 경찰들이 지나가는 시민들을 트럭에 수없이 싣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등등의 흉흉한 소식들도 들려왔다. 거리에서 눈에 띄는 젊은이들은 무조건 트럭에 실려가 죽거나 자취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때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아들을 붙들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 엄마의 순간적인 직감으로 단호한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혼자 두고두고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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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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