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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봄 어느날 ‘성경공부’ 회원 교사들의 방문을 받고 광주 북성중 현관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80년 ‘5·18’ 이후 필자(맨 왼쪽)는 국가폭력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당한 수많은 시민들의 넋을 추모하는 뜻에서 이후 1년 남짓 ‘나홀로 검정 옷’을 입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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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27
‘5·18’ 때 휴교를 했던 학교는 1980년 6월4일 개학했다. 교감선생님께 5·18 영령들을 위한 추모 묵념을 요청했지만 묵살되었다. 그 며칠 뒤인 6월7일 소준열 전남북 계엄분소장 이름의 공문이 학교로 왔다. ‘전남북 계엄분소 서신 제1호 송부’ 제목의 공문 내용은 “전남북 계엄분소에서 발송한 ‘학생 정신순화 당부’란 서신 제1호를 이첩하니 전 직원 숙독하여 계엄업무에 적극 협조 있길 바랍니다”라는 것이었다. ‘학생 정신순화 당부’에 덧붙여진 서신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개학 후 작금의 신문보도 내용 중 학교 개학 스케치 사항을 분석해 볼진대, 기사 내용은 학생들의 정신을 순화시킬 수 없음은 물론, 오히려 학생들에게 현 시국을 오도하고 군-민 학생 상호간에 이간과 불신풍조를 조장하는 계기를 마련케 하였습니다. 작금의 신문에 게재된 정신순화 역행 기사 사례의 몇 가지 예를 들면, ‘울어버린 개학…/ 빈자리에 국화 송이만…/ 주인 잃은 자리에 하얀 장미꽃, 묵념 끝 울음바다/ 침울한 등굣길 모두 조의 묵념/ 기타 근조 등 사진 게재’(6월4일치 <전남매일신문>), ‘주인 잃은 책상 위에 한송이 국화꽃만/ D중 3학년2반 교실/ CM 중에도 빈자리/ 기타 국화꽃 등 사진 게재’(6월4일치 <전남일보>) 등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눈을 감아라. 그리고 국군 아저씨들이 좋으냐 나쁘냐’는 등과 같은 질문을 통해 학생들을 현혹시키고 있다는 보고 등이 있습니다. 실로 개탄을 금할 수 없는 바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학생 정신순화를 위한 전체적이면서도 세밀한 계획 발전에 행정력이 동원될 것을 교육행정 및 학교 당국에 호소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총칼과 군홧발로 무고한 시민들을 수없이 죽인 책임을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은 현 시국을 오도하고 군-민 학생 상호간에 이간과 불신풍조를 조장한다’는 식으로 덮으려 하다니…. 5·18 이후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광주 일대에서는 검정 리본을 옷깃에 달고 다니는 시민이 늘어났다. 그로 인해 교사를 비롯한 공무원들에게 계엄사에서 ‘검정 리본 패용 금지’라는 전첩을 보내와 학교 직원회의 때 그 내용을 전달해 주었다. 나는 그다음날부터 아예 상하 검정 옷으로, 스타킹까지 검은색으로 갖춰 입고 다녔다. 리본을 단 시민들도, 검정 옷을 입은 나도 억울한 주검에 대해 산 자의 예의를 갖추고 명복을 빌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랬더니 몇 달이 지난 뒤 평소 비교적 말이 없으셨던 정아무개 교장선생님이 한마디 건넸다. “정 선생은 항상 검정 옷차림으로 다니는데 다른 색깔있는 옷을 입으면 훨씬 좋을 텐데요….” 그러나 5·18 이후 그 기막힌 현실을 우리는 어디에도 토로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했다가 누가 어떻게 고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광주 사람끼리도 심정을 나눌 길이 없었다. 한 교무실 안에서 옆에 앉아 일하는 동료 선생님하고도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 길이 없는 삭막하고 참담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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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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