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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당시 광주 북성중학교에서 수학교사로서 도덕 과목도 담당했던 필자(뒷줄 왼쪽 넷째)는 5·18 이후 학생들에게 진실과 정의를 가르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할 때마다 기독교계의 덕망 높은 어른이었던 백영흠(앞줄 왼쪽 셋째) 목사를 찾아가곤 했다. 스산한 마음들이 모여 교감을 나누며 용기를 얻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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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29
5·18 광주민중항쟁을 겪던 1980년 당시 북성중학교에서 재직중이었다. 중학생들을 앞에 두고 수업하면서 진실을 가르칠 수 없는 현실이 몹시 가슴 아팠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이 아이들이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몸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이 나라 미래는 희망이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올바른 것을 가르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맑고 천진난만한 눈동자들과 마주칠 때마다 목이 메어 왔다. 목이 메어 설명을 잠시 멈추면 재잘거리며 떠들던 학생들도 순간 조용했다. 선생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학생들은 눈치가 굉장히 빨랐다. 5·18 그 엄청난 사건을 겪고도 학생들에게 진상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는 그 아픔, 그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수업만 해야 하는 현실에서 교사의 역할에 대한 한계를 통감해야 했다. 무참한 학살을 저지른 뒤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웠다. 경찰서와 파출소마다 구호를 써 붙이고, 학교로 날아오는 공문에도 그 글귀가 쓰여 있었다. 수많은 생명을 피 흘리며 억울하게 죽게 해놓고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니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뜻있는 선생님들은 “국어사전을 다시 써야 되지 않겠느냐”며 어이없어했다. “군부독재가 정의사회를 구현한다는데 어떻게 과거의 독립운동가들,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린 열사들의 정의와 똑같이 말할 수 있겠는가? 사전을 바꿔야 되겠다”며 울분을 토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그때 광주·전남이 얼마나 억울하고 처참한 도시였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항쟁 이후 반공교육은 더 철저해졌다. 사서교사였던 나는 상담교사와 함께 부족한 사회교과 자리를 메우기 위해 도덕 수업도 맡아야 했다. 과목은 도덕이지만 내용은 주로 반공교육 위주였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민중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했다. 정권의 이런 의도가 학교 현장에서는 반공교육 강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한다. 북한 동포들도 내 형제자매들이다. 우리는 통일을 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학생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북한은 지구촌에서 상대해서는 안 될 우리의 원수이고, 독침을 가지고 다니며 전쟁을 좋아하는 나쁜 사람들”이라 배워왔기에 “북한 동포들은 우리의 형제자매이며,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내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님, 북한은 나쁜 놈들이에요”라고 말하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 그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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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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