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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망월동 옛 묘역 입구 바닥에 놓여 있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 표지석. 1982년 3월 전남도정 순시를 마친 대통령 내외가 전남 담양군 고서면의 한 농가에서 민박한 것을 기념해 세운 비석을 89년 초 광주·전남민주동지회 등에서 옮겨놓은 것이다. 이 방문 직후 광주시장은 필자를 비롯한 여교사 대표들을 모아놓고 정권 홍보와 반공 교육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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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31
북성중학교에서 5년 만기를 채운 1982년 3월 광주농업고교로 발령을 받았다. 사서교사 순환배치대로라면 광주고교로 옮겨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물론 주위에서도 의아해했다. 동료 선생님들도 ‘농고는 실업계 학교인데… 정 선생님을 농고로 보내는 것은 너무했다’고 할 정도였다. 교육청에서 ‘의식있는 교사’로 분류가 된 모양이었다. 부당한 인사조처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난생처음 신경성 장염을 앓았다. 신경성 장염은 세균성과는 달리 회복이 더디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퇴근 뒤 매일 주사 치료를 받았다. 개학하는 날, 새 학교 선생님들과 첫인사를 했다. 그 시대에는 인사 이동 결과가 발표되면 교장, 교감 선생님 댁으로 미리 인사를 하러 가는 것이 교직사회의 예의이며 풍속도였다. 학교사회는 수직적 관계가 명확했다. 교장, 교감 선생님한테 잘못 보이면 학교생활이 어려워진다는 분위기도 암암리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학에 맞춰 학교로 바로 출근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전남여고에서 같이 근무했던 교감 선생님이 내 심정을 헤아려 먼저 위로를 해주었다. “정 선생님, 오실 때는 울고 오셨지만 5년 임기가 되어 가실 때는 학교가 너무 좋아서 안 간다고 울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계시니 든든하네요.” 나는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부끄러웠다. 이 학교는 좋고, 저 학교는 나쁘다는 분별심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교감 선생님의 위로 한마디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농고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었다. 새 학교 적응하랴 업무 분장하랴 바쁜 3월을 보내던 중순 무렵, 교감 선생님이 공문을 보여줬다. 김양배 당시 광주시장이 초청하는 여교사 간담회가 29일 광주관광호텔에서 있을 것이니 퇴근 뒤 각 학교에서 몇 명씩 꼭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꼭 가야 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날짜가 가까워 오자 교감 선생님이 다시 불렀다. “오늘 전첩이 왔는데 선생님이 꼭 가셔야 되겠네요. 한 학교에서 여선생님 한두명씩 꼭 참석하라고 했어요. 우리 학교에 정식 여교사는 선생님뿐이시니 꼭 참석하셔야 될 것 같아요.” 그때 광주농고에는 여교사가 나 혼자였을 뿐만 아니라, 1909년 개교 이래 72년 역사에서 정식 여교사도 내가 처음이었다. 할 수 없이 가야만 했다. 간담회장에는 공사립을 막론하고 여교사 200여명이 참석해 넓은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단상을 보니 한가운데 시장이 앉고, 양옆에 경찰서장, 반공연맹지부장, 교육청 장학관과 장학사, 시청 국·과장 등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홀 군데군데에는 시청 직원들이 무선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출입구 뒤쪽에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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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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