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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다시 시작한 성경공부 모임에서 필자는 김천배 선생을 통해 다석 유영모(왼쪽) 선생의 ‘노자’ 이야기와 민속미술사학자 조자용(오른쪽) 선생의 ‘삼신사상’ 등 우리 시대 큰 스승들의 가르침을 익힐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삼신학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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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35
1982년은 개인적으로 시장 초청 간담회 발언 사건과 함께 우리 교육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 잊을 수 없는 해이다. 그해 1월5일 서울 다락원에서 한국와이엠시에이(YMCA)중등교육자협의회(초대 회장 오장은·서울 신일고·이하 Y교협)가 결성되었다. 곧바로 광주와이엠시에이교사회와 서울와이엠시에이중등교육자회(2월1일)도 생겼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교사들은 유신독재 아래 맹종을 강요당하며 정권 홍보용으로 전락한 교육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비공개 소모임 활동을 했다. 감시와 극심한 탄압을 받던 교사들은 공개적이고 전국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던 차에 만난 시민단체가 오랜 역사를 지닌 와이엠시에이였다. 청소년 교육 문제에 관심이 높았던 와이엠시에이는 ‘학교교육과 청소년 대책을 협의하는 중등교사들의 연구모임’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와이엠시에이의 요구가 공개단체의 필요를 느낀 교사들의 요구와 만나 Y교협 결성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후 지역 Y교협 창립이 여수·평택·춘천·안동 등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해 1월 겨울방학 때 광주Y교사회를 결성하기 위한 모임에 참가했다. 윤영규·명노근·문병란·임추섭·고진형·이경희·최화자·고병희 선생 등과 증심사 입구 삼애산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토론했다. 고진형·고병희 선생님이 간사를 맡아 광주Y교사회를 이끌었다. 그해 3월 시장 간담회 사건이 없었던 일로 마무리된 7월 이후 나는 가깝게 지내던 사립학교 선생님들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사립학교 선생님들과는 5·18의 아픔을 같이 껴안으며 힘든 시기를 넘겼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공부도 함께 했다. 물론 방학이면 교육위원회(현 교육청)가 실시하는 제도권 연수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 내용에 흥미를 갖기 어려웠다. 뜻이 맞는 선생님 7~8명이 방학이면 학원 강의실을 빌려 자체 연수를 했다. 박봉을 쪼개 연수비를 마련해 강사를 모셨다. 겨울방학 때는 칸트를 비롯한 서양철학을 독일에서 공부하신 대건신학대 교수이신 정달용 신부님을 모시고 공부했다. 그해 5월에는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이철희 부부가 대규모 어음사기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금융실명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제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전남대 모희춘 경영대학원장님을 강사로 모시고 여름방학 동안 경영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5·18 때문에 중단했던 김천배 선생님과 성경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영어와 일어가 능통하셨던 김 선생님은 5월 광주학살이 일어난 직후 도청 앞에서 외신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 일로 수배를 당했는데 인터뷰 내용을 정확히 들은 적은 없으나 5·18의 참상을 그대로 말씀했을 것이다. 수배를 피해 어느 기자 집에 피신해 계셨는데 건강이 악화하자 가족들의 권유로 병원 치료를 위해 자수를 했다. 이후 다행히 건강이 회복되어 성경공부 모임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성경뿐 아니라 ‘노자’를 공부했다. 교재는 유영모 선생님이 노자를 순우리말로 번역하신 <늙은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반야심경>이 역시 순우리말로 풀이돼 있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에 대해서는 김천배 선생님한테 듣고 배웠다. ‘오후 3시께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해서 다석(多夕)이란 호를 지닌 유 선생님은 교육자·철학자·종교가 그리고 사상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이름있는 한글학자들이 설날이면 무릎 꿇고 세배하는 숨은 한글학자였다. ‘늙은이’를 우리는 한달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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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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