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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출간되자마자 금서로 회수당하는 바람에 ‘희귀본’이 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의 표지.(왼쪽) 그해 필자와 라디오방송 연출자와 진행자로 인연을 맺었던 이석형 피디는 훗날 전남 함평군수가 돼 ‘나비축제’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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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48
1988년 여름방학 때 2주간의 미국-캐나다 연수를 다녀온 뒤, 떠나기 전에 미리 사두었던 전대협의 통일운동 책 <우리는 결코 둘일 수 없다>를 효광여중 동료 선생님들에게 선물했다. 다른 학교 선생님들에게 줄 책이 더 필요해 서점에 연락했더니 ‘그 책은 이제 없다’고 했다. “왜요?”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그러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감이 왔다. 그래서 다음날 서점으로 찾아갔더니 정보기관에서 회수해 가서 어떤 서점에도 없단다. 취급해서는 안 되는 ‘금서’가 된 것이었다. 전대협은 그해 6월 2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6·10 민주화투쟁 1주기 기념대회 및 판문점 출정식’을 여는 등 통일운동을 선도하고 있었다. ‘87년 대선’을 통해 그해 2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지만 군복만 안 입은 노태우 군부정권은 여전히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책을 돌린 뒤 학교 행정실장이 도서실로 찾아오더니, “선생님, 이 책 너무 이른 것 아닐까요?” 하며 넌지시 얘기했다. “우리가 분단된 지 40년이 넘었는데 빨라요? 빠른 것이 아니라 늦은 거죠.” “그래도 우리 정서로….” “언제까지 한없이 여기저기 눈치보고 갈라져 살아야 되겠습니까? 대학생들이 통일을 그토록 열망하면 어른들이 같이 힘을 보태줘야지요. 그래서 선물로 드린 거예요.” “그래도 빨라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단면을 확인한 씁쓸한 대화의 기억이다. 그해 여름 또 하나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한국방송>(KBS) 라디오 광주지역국 피디로부터 오전에 방송하는 여성 프로그램의 한 부분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학교에 얘기해서 수업시간을 조정하고 매주 수요일에 방송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광주지역 시내버스 기사들이 파업을 하게 됐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버스기사들의 업무가 과중해 사주와 협상을 시도했는데 잘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시내버스 운행은 중지되었고, 시청에서 승합차로 구간별 임시운행을 하고 있었다. 애초 여성 프로 진행을 요청했던 그 피디한테서 ‘버스 파업에 대한 시민의 소리를 듣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더러 출연해서 의견을 밝혀달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선생님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라”고 했다. 나는 방송에서 “업주들도 운영상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기사님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기사님들이 요구하는 내용이 얼마나 절박한지 이해해야 한다”는 요지로 파업을 지지하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는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이 어용인 ‘자동차노련’에서 막 분리·독립했지만 여전히 어용 성향이어서 기사들의 요구를 제대로 대변해줄 여건이 되지 않았다. 나만이라도 기사님들의 고충을 대신 전하고 싶었다. 역시나, 방송이 나간 뒤 기관에서 이양우 교장 선생님한테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방학이라 집에 있는데 교장 선생님이 전화를 해서 방송 출연 사실을 물었다. 그 뒤로도 기관에서는 교장 선생님에게 몇 차례 주의를 요구하는 전화를 한 듯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첫 확인 이후 나한테는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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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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