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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5대 위원장을 맡은 필자(오른쪽)가 1993년 4월22일 서울 우면동 교총복지회관으로 이영덕 한국교총 회장을 방문해 악수하고 있다. 전교조 대표단은 이 자리에서 ‘해직교사의 조건없는 전원복직’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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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76
나와 오병문 교육부 장관의 공식 만남 다음날인 1993년 4월9일, 해직교사 서울후원회의 공동대표인 김승훈 신부와 김찬국 전 연세대 부총장, 총무간사인 박상용 연세대 교수도 교육부 장관을 면담했다. 대표단은 과거 정권의 잘못을 새 정권이 바로잡아야 하며, ‘조건부’나 ‘선별’ 등을 내세운 복직이 아니라 조건 없는 전원복직을 촉구했다. 또 교사의 노동3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국제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니 전교조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김승훈 신부님과 김찬국 부총장님은 늘 전교조를 걱정하며 곁에서 힘을 북돋워주신 든든한 선배요 스승이었다. 그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돕기 전시회가 열려 나는 전교조 대표로서 참석했다. 장소는 기억나지 않으나 할머니들을 비롯해 이효재 교수님, 지선 스님, 박정기 유가협 회장(고 박종철 열사 아버지) 등 많은 분이 함께했다. 그런데 ‘전교조 위원장 정해숙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유가협 소속 어머니 한 분이 “어? 아닌 것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요?” “어제 텔레비전에서 볼 때는 미인이었던 것 같은데…?”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화면에 그렇게 예쁘게 나왔어요?” 주위의 여러 사람들과 웃으며 되물었지만 그분은 끝까지 “아닌데… 아닌네”라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복직문제 해결의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던 시절,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이다. 전교조는 4월16일, 4월혁명연구소(당시 소장 윤성식)로부터 ‘4월혁명상’을 받았다. 연구소가 밝힌 시상의 이유는 ‘엄연한 실체로 존재하는 전교조는 4월혁명 이념의 현재적 계승과 민족·민주운동의 강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권찬주(김주열 열사 어머니), 이소선(전태일 열사 어머니), 장준하, 이수병, 김상진, 문익환 목사에 이은 수상이었다. 교육부 장관 면담 이후 나는 각계 인사들과 만나 해직교사 복직문제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의견을 들었다. 맨 먼저 4월22일 한국교총 이영덕 회장과 만나고자 교총 사무실을 방문했다. 교총 회장과의 만남 역시 전교조 결성 이후 처음이었다. 이 회장은 교육계에서는 선배 원로였고 우리 선생님들 중에서도 제자가 많았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우리 일행이 10여분 늦게 도착하자 이 회장은 한시간 뒤에 다른 일정이 잡혀 있다며 상당히 서둘렸다. 그래서 이야기를 길게 나누지는 못했다. 당시 광운대·상지대·경원대 등 여러 대학의 입시부정 사건이 잇따라 터지고 있었다. 또 교사 채용 과정의 금품수수, 수익용 재산의 무단 처분 등 문제 사학의 각종 부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먼저 이 회장에게 당면한 교육비리 척결과 교육개혁을 위해 교총이 전교조와 함께 노력할 것을 제안했다. 또 사학재단과 일부 교장들이 전교조 해체와 해직교사 복직 반대 건의서를 정부에 보낸 것은 문민정부의 개혁과 화합정치에 걸림돌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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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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