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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9.29 20:01 수정 : 2011.09.29 20:01

와이교협의 <교사신문>과 민교협의 <민족과 교육>을 통합해 전국교사협의회 창립 직후인 1987년 10월1일 창간된 <전국교사신문>. 89년 6월20일치(제21호)부터 <전교조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소송 끝에 96년 7월에야 정기간행물로 등록됐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97

1996년 7월 1박2일의 휴가를 얻어 강원도 오대산 중대 보궁에 머물렀다. 다음날 출근하니 한겨레신문 기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축하합니다.” “뭔데요?” “어제 재판에서 승소하셨잖아요.” 사실 전화받을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몰랐다’ 하기가 난처해 “아, 그거요.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내용인즉 <전교조신문>의 정기간행물 등록 불허 관련 항소심 결심공판 결과였다. 이수일 사무처장에게 상황을 물었더니 ‘어제는 법정에 아무도 안 나갔다’고 했다.

전교조는 95년 4월 공보처에 <전교조신문>의 정기간행물 등록 신청을 했다. 곧 이은 공보처의 불허 통보에 우리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96년 7월24일 서울고등법원 제8특별부(재판장 김경일)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재판부는 “공보처가 불허 사유로 삼은 <전교조신문> 제호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약칭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과, 발행인이 전교조 위원장인 점을 들어 등록을 거부했으나, 비합법 단체임을 내세워 등록을 거부한 것은 막연한 추측에 의해 그 발행 주체를 오인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정기간행물법상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당시 소송 대리인은 조용환 변호사였다. 승소 소식을 들은 직후 나는 조 변호사께 전화해 “그동안 수고하셨네요”라고 인사를 했다. 앞뒤 얘기도 전혀 없이 건넨 일방적인 인사였다. “실은 저도 어제 다른 재판이 있어 못 나갔는데 승소했네요.” “고맙습니다.” 모처럼 뜻깊은 결과에 웃음으로 그간의 노고를 서로 격려했다. 비합법 노조 시절의 승소 판결은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지금도 조용환 변호사와 재판장께 고마운 마음이다.

96년 말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광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1월 초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당시 권 위원장은 민주노총 총파업으로 수배 상태였다. 앞서 12월26일 새벽 6시 여당인 신한국당(옛 한나라당)이 변형근로제, 정리해고제 등을 포함한 노동법 개악안을 날치기 처리하자 민주노총은 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후 명동성당 뒤뜰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고, 권 위원장도 천막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명동성당으로 찾아가 권 위원장을 만났더니 1월23일부터 프랑스에서 열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 노동조합자문위원회(OECD TUAC) 회의에 민주노총 대표로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분이 가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내 얘기에 권 위원장은 “전교조가 비합법 상태이기 때문에 국제무대에 민주노총 대표이면서도 전교조 대표로 선생님이 참여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재차 권유했다. 전교조를 어떻게든 지원하기 위한 권 위원장의 깊은 배려에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전교조 가족의 일원이라며 늘 합법화를 걱정하던 권 위원장이 기회를 준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윤영모 민주노총 국제국장이 함께 참석했다. 영어에 능숙하고 국제관계를 잘 아는 윤 국장의 성실한 노력이 돋보였고,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회의장 현장에서 외국 기자들과 만난 우리는 한국의 후진적인 노동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개악된 노동법과 안기부법, 그리고 절차까지 무시한 한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 설명했다. 영국의 기자가 놀랍다는 듯 “코리아에서는 교사가 노동자가 아니면 누가 노동자입니까?” 하고 반문을 했다. 한국의 노동탄압 상황이 국제무대에서는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지를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셈이었다. 평소 회원국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함부로 내지 않는 경제협력개발기구 이사회도 당시 이례적으로 한국의 노동법 개정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공식 회의 참가 외에도 우리는 프랑스 노총을 비롯한 주요 노동조합, 국제노동기구(ILO) 등의 초청을 받아 여러 노조 지도자들을 만났다. 결국 귀국 날짜를 연기해야 했다. 프랑스 교원노조로부터는 대의원대회에 초청을 받았다. “분단된 한국에서는 교사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좌경·용공으로 몰릴 정도로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가 무척 어렵다. 프랑스 교원노조 동지들께서 세계는 한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활동에 적극 연대해주기를 바란다.” 한국인 유학생의 통역으로 전한 내 얘기에 참가자들은 굉장한 박수를 보내줬다. 한반도 통일을 얘기할 때 눈빛을 빛내며 관심을 보이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특히 프랑스의 뜻있는 교육동지들은 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를 동정하며 돕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당시 프랑스에 망명중이던 홍세화씨도 만났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박정희 정권 말기인 79년 프랑스 체류중에 망명자가 된 그였다. 나는 프랑스에 가기 얼마 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고 유신독재의 고통 속에 17년째 타국에서 힘들었을 홍씨를 잠시라도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짬을 내 만남을 청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같은 시대의 아픔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지녔던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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