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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2월7일 각계 인사 6만명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한 가운데 ‘박종철군 추모대회’가 전국에서 동시에 열리며 6·10 항쟁으로 이어지는 고문 규탄과 민주화 행진이 시작됐다. 전두환 정권은 유가족의 대회 참석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사진은 서울 추모대회를 이끈 재야단체를 비롯한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진입하려고 경찰과 맞서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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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33
아내 정차순은 신문을 읽으며 비로소 아들 철이(박종철)의 죽음이 단순히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박정기 부부는 아들에 관한 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1987년 1월19일치부터 ‘고문 사라져야 한다-추방 캠페인’ 기획 시리즈를 4회에 걸쳐 연재하며 고문 문제를 여론화하고 있었다.
정차순은 아들의 숨결이 닿은 물건들을 만지고 끌어안으며 주저앉곤 했다. 아들의 손때 묻은 작은 물건들 하나하나가 가슴에 사무쳤다. 밖을 떠돌다 귀가하면 맨 먼저 아들이 썼던 방 문을 열었다.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문 너머 조그만 방에서 어미를 뒤돌아보며 아들이 생긋 웃고 있을 것 같았다. “엄마!” 하고 부르며 와락 자신을 끌어안을 것 같았다. 아들이 없는 방을 확인한 어머니는 매번 방바닥에 무너졌다.
“철아, 철아. 이놈의 자슥아!”
목멘 그 소리를 들으며 박정기는 눈물을 훔쳤고, 다시 문밖을 나섰고, 아무 버스나 잡아탔다. 그는 아내가 얼마나 끔찍하게 막내를 아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보다 아내가 겪는 고통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는 철이가 그리울 때면 정태춘의 노래 ‘떠나가는 배’를 홀로 불렀다. 아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아들은 부산에 내려오면 혼자 익힌 기타를 치며 누나와 함께 ‘떠나가는 배’를 불렀다. 아들이 부산을 떠난 뒤로는 정태춘·박은옥의 음반 테이프를 찾아 혼자 그 노래를 듣곤 했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도 아들의 부재를 견디기 위한 노력이었다. 평소에도 그는 금강경을 읽으며 시름을 잊고 마음을 기대곤 했다. 때론 금강경의 글귀를 빈 노트에 되풀이해 썼다. 금강경에 빠져 있으면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그럴 땐 마치 아들이 곁에 있는 듯 느껴졌다.
장례를 치르느라 부산에 내려왔던 맏이 박종부는 며칠 더 머물렀다. 가족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던 그는 이후로 매주 한두 차례 서울과 부산을 오갔다. 직장생활은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형사들이 회사와 자취방을 감시했고, 그를 따라다녔다.
사람들은 박정기를 피했다. 직장 동료들도, 친구들도, 친척들도 하나둘 그에게서 멀어졌다. 가까이하면 어떤 해를 입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월7일 열린 ‘박종철군 추모대회’ 땐 정부의 방해로 친척들조차 참석할 수 없었다. 가족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용기 있게 다가오는 손길이 있었다. 동네 사람 한 분은 울화병에 녹두즙이 좋다며 가져다주었다. 한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가족들은 녹두즙으로 연명했다. 매일 술에 매달린 박정기가 병을 얻어 누웠을 땐 해동병원 원장이 무료로 건강을 돌봐주고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생면부지의 시민들이 위로의 전화를 걸어올 때도 있었다. “아드님은 훌륭한 학생입니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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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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